[염혜순 칼럼]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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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칼럼]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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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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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벚꽃이 피었나 했더니 하루 이틀 봄비에 꽃잎이 진다. 처음엔 한두 개 날리더니 센바람 한번 부니 함박눈처럼 휘몰아친다. 꽃비가 내리는 아파트 단지를 여덟 살 손녀는 두 손을 들고 뛰어다니느라 바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거리며 쏟아지는 꽃잎을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잠깐 피었다 지는 꽃보다 저 녀석이 더 사랑스럽다.
꽃잎하나 잡아보겠다고 한참 손 벌리고 뛰어다니더니 그 손엔 꽃잎이 하나도 잡히질 않았다. 나에게 꽃잎 좀 잡아달란다. 할 수 없이 나도 같이 꽃비 속을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중 하나가 내 손에 내려앉으니 아이가 소리치며 좋아한다. ‘꽃잎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대요. 할머니 이제 첫사랑 이루어지겠네.’한다. ‘그래? 할머니 첫사랑이?’하니  ‘네에.’ 하며 단호한 눈빛이다.  뜻밖의 말에 내가 큰 소리로 웃으니 아이도 깔깔거린다. 기억 저쪽 아득한 이름의 첫사랑이 잠시 떠올랐다. 바람은 꽃 사이를 휘몰아치고 꽃비는 수없는 사람들의 첫사랑처럼 눈부시게 하늘을 맴돌며 춤추고 있다.
‘너는 첫사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 아이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건네 보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럼요, 첫사랑이 이루어 져야죠.’ 한다.
‘너 첫사랑이 있구나. 그게 누구야?’ 내 은밀한 질문에 아이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막으며
‘그건 비밀이에요, 원래 첫사랑은 비밀이잖아요.’
‘누가 그래?’
‘내가요.’
‘아니 이 녀석이 할머니한테 비밀이 다 있어?’
내가 아이를 간질이며 달려들자 아이는 또 깔깔거리며 꽃비 사이를 뛰어 달아난다. 아이의 웃음이 첫사랑처럼 달콤하게 퍼진다.
여덟 살 손녀에게 첫사랑은 꽃비 속을 달리는 저 맑은 웃음일까? 그 아이도 자기가 생각하는 ‘첫사랑’이라는 게 있고 또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게 놀랍고 신기하다.  저 아이의 첫사랑과 은발인 나의 첫사랑은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모습일 것이다. 아무래도 달콤한 젤리 한 봉지로 여덟 살 가슴속의 비밀보따리를 풀어봐야겠다. 오늘 우리 둘 사이엔 과일 젤리처럼 새콤달콤한 비밀이 하나 생길 지도 모르니까.
생애 처음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그토록 설레며 자신도 모르는 새 시작 돼버린 그 버거운 감정을, 너무 벅차서 어쩔 줄 모르다 놓쳐버린 순간들을, 누가 그렇게 쉽게 잊을까?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첫사랑처럼 이루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 같다. 누군가 ‘봄은 첫사랑 그 여자처럼 온다.’고 쓴 글을 보았다. 어느 순간 눈부시게 다가와 온통 세상을 꽃밭으로 만들고  빨리도 사라져 가는 봄날 같다고. 문득 아이의 작은 손 사이로 수없이 빗겨가는 꽃잎 같은 순간들이 아련하게 스친다.
이제는 많은 것이 기억 속에서 지워졌지만 봄날처럼 다가왔던 순간이야 흘러갔다고 아주 가는 건 아닌 모양이다. 젤리 한 봉지에 넘어가서  여덟 살 ‘첫사랑’ 비밀을 속삭이듯 귀에 대고 말해주는 아이를 보며 ‘사랑’이 가진 숨길 수 없는 색깔이 안개처럼 뿜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엔 바람이 불고 봄은 꽃으로 피었다가 다시 꽃비로 흩어지며 온 세상을 흔든다. 첫사랑처럼 다가온 봄이 흘러가고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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