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땔나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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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땔나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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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1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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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숲 가운데 서서 큰 호흡을 하며 나무의 향기를 깊이 마신다. 산의 향기는 살아 온 추억과 함께 언제나 산다는 것에 감사함을 불어넣어 준다. 숲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생물을 품어 안고 있다. 산에서는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이 쉴 새 없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준다.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나무와 풀들이 온 산을 덮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나무도 있고, 발밑에 불어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작은 풀꽃도 있다. 사철 완벽하게 변하는 산의 모습을 산을 보러 오는 큰 이유이다.

산에 오면 큰 나무도 어루만지고, 작은 나무도 쓰다듬어 주며, 큰 나무에 치어 자라지 못하는 어린 나무를 잘 자라도록 보살펴 준다. 두 나무가 한 구덩이에서 자라고 있으면 한 나무라도 숨을 잘 쉴 수 있도록 손을 보아주기도 한다.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쓰러진 나무가 많이 눈에 띈다. 여름비에 땅이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데, 폭풍이 몰아닥치면 나무의 무게가 뿌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넘어지나 보다. 아무리 굳게 서 있는 나무도 모진 비바람을 피하기 힘 드는지 20년, 30년 자란 나무들이 넘어져 있다. 쓰러져 생명을 잃은 나무는 세월이 많이 지나면 썩어 거름이 되겠지만 나무 밑에 깔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작은 나무들이 안쓰러워 큰 나무를 치워 주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난다.

주변을 훑어봐서 썩으면 거름이 될 수 있는 나무는 옆에 나무가 잘 자라도록 치워주고, 쓰러진 상태에서 다른 나무에 짐이 되어 방해가 될 것 같은 나무는 골라서 난로에 때려고 끌어온다. 굵거나 다루기 힘든 나무는 톱으로 토막을 내어 가져오기 편하게 자르고, 가는 나무는 끈에 매어 그대로 끌고 온다.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서 나이테를 세어 보면, 아무리 가느다란 나무라도 작게는 십 년에서 좀 굵은 나무는 보통 20년은 자란 나무들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묵묵히 감싸 안고 힘겹게 자랐을 텐데 자연의 조화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생명을 잃은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쓰러진 나무를 집으로 끌어오느라 힘들어도, 톱으로 자루고 도끼로 패서 차곡차곡 쌓아 놓고 난 후의 그 흐뭇함은 끌어 올 때의 힘들었던 일들을 다 잊게 한다.

난로에 넣고 불을 붙이면 오랫동안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던 나무라도 금방 타서 없어지는 것을 보고, 긴 세월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아 허망한 생각에 마음이 싸해진다.

나에게는 6·25전쟁 후 산이 헐벗어 걱정하던 시절을 살아온 기억이 남아 있어 지금 풍성하게 자라는 나무를 보면 마음도 덩달아 풍성해진다. 겨울이면 집안의 남자들은 먼 산으로 나무를 하러 새벽에 떠나서 저녁 어스름에 나무 한 짐을 지고 돌아 왔다. 그렇게 나무 광을 채워도 여러 개 있는 방을 다 데우려면 언제나 따뜻하게 살기는 힘들었다. 장작이라도 한 마차 사 들이는 날은 집안에 잔치가 벌어지는 듯했다. 연탄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무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그 시절 겨울을 나기 위해 연탄을 수백 장씩 들여 놓는 것도 하루 종일 걸리는 큰일이었다. 지금은 농촌에서도 심야전기로 싼값에 방을 덥게 하고, 가스로 취사를 해결하니 살기가 편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산에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다.

저녁 어둠이 내려앉을 때, 집으로 가는 길가의 마을들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먼 옛날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향수 속으로 이끌어 간다. 벽난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온 가족이 난로 가로 둘러앉아 즐기는 영상이 떠올라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게 하면서 미소가 떠오른다.

난로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세상만사 번잡한 일들이 모두 불꽃에 묻혀 버리고, 생각은 온통 아름다운 상상의 날개 속으로 들어간다. 불꽃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난로에서 고구마가 익는 구수한 냄새는 행복감마저 가져다준다. 난로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눈 오는 창밖까지 내다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죽은 나무 끌어다 장작을 만들어 놓고 난로를 때니 따뜻함과 낭만이 함께 어우러져 살맛이 난다.

겨울에 유럽의 시골을 지나면서 집집마다 벽에 쌓아놓은 장작이 예술품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장작 쌓아 놓는 것만 보고도 그들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부러웠었는데 이제 우리도 장작을 쌓아놓고, 눈이 많이 와도 추운 날씨가 닥쳐도 난로를 피워놓고 온갖 이야기를 연출해 내고 있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겨울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행복하다.

땔나무에 대한 많은 추억들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난로를 피우면서 이렇게 따뜻하게 살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운 것은 누구의 덕인지 마음을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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