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토종 나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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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토종 나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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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0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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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나팔꽃에 담긴 애틋한 이야기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수수깡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 아침이면 이슬을 머금고 수줍은 듯 핀 나팔꽃이 왜 그렇게 좋았었는지, 그 끈이 지금까지 이어져 요즘도 나팔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냥 반갑다.

지나간 기억들이 떠오르며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 속에는 이 세상을 떠난 부모형제의 모습도 담겨 있고, 어릴 적 살아왔던 추억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마음속에 깊이 침잠해 있던 귀중한 기억들이, 살아오면서 늘 나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다.

야생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파란색의 자그마한 토종나팔꽃도 좋지만, 늘 보던 야생 꽃보다 색깔이 더 고운 빨갛고 큰 나팔꽃을 키우고 싶어 꽃씨 파는 곳을 갔다. 이것저것 고르다가 몇 가지 꽃씨를 샀다.

그중에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화려하고 예쁜 나팔꽃 사진이 있는 꽃씨를 손에 넣어 돌아오는 길이 마냥 흐뭇했다. 어느 정도 자라면 적당한 장소로 옮기려고 우선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함께 구해 온 꽃양귀비며 접시꽃 등을 심었다. 씨앗이 들어있는 봉투의 그림을 보면서 원하던 꽃이 피리라는 기대로 사뭇 마음까지 설레었다. 드디어 싹이 트기 시작하자 나팔꽃씨는 실하게 잘 나왔고, 접시꽃과 꽃양귀비가 그런대로 싹을 틔웠다.

나머지 몇 가지 꽃씨는 아예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제법 비싼 값을 주고 산 꽃씨들인데 이웃나라에서 생산된 꽃씨가 또 이렇게 실망을 시키는구나 하면서 나온 꽃모종이나 잘 키우자고 정성을 들였다. 꽃씨 봉투에 사진이 있지만 그래도 어떤 모양의 꽃이 나올지 많은 기대를 하면서 잘 자라도록 환경을 좋게 해주었다.

드디어 모종이 옮겨 심을 만큼 자라서 접시꽃과 양귀비는 화단에 심었고 뿌린 씨만큼 다 나온 나팔꽃의 모종은 여러 곳에 나누어 심었다. 개가 뛰어놀 수 있도록 넓게 쳐 놓은 개집 울타리에도, 새가 와서 물고기를 잡아먹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연못을 덮은 망 지지대인 쇠파이프에도, 죽은 나무에도, 은행나무 밑 돌담에도, 나팔꽃이 타고 올라가기 좋을 만한 장소에는 모두 심었다. 이국으로 시집을 온 씨앗이지만 건강하고 왕성하게 덩굴을 뻗으면서 잘 자랐다. 이제 여기저기 피어날 아름다운 꽃을 볼 일만 남았다.

양귀비는 일찍 꽃을 피워 진분홍과 연분홍, 흰색으로 생각보다 튼실하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예쁜 자태로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접시꽃은 내년에나 꽃을 볼 것이니 그냥 잘 자라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문제는 가장 희망을 건 나팔꽃이다. 봉오리를 내미는 데 어째 색깔이 심상치가 않다. 꽃씨를 담았던 봉투의 빛깔과는 전혀 다른 토종나팔꽃이다. 그래도 궁금한 마음으로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다 다를까 그 꽃씨봉투에 그려진 그림과는 정반대의 우리 집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야생나팔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 허탈감과 속은 것에 화가 났다. 야생에 널려 있는 것이니 많은 양을 채취하기가 쉽고, 비싼 값으로 수출을 할 수 있어서 그랬을까. 그 덩굴은 왕성하게 온갖 곳을 다 타고 올라가 숲을 이루고 있다.

어떻게 그런 사기를 했을까 마음을 끓였다가 아마 그곳에는 이 꽃이 귀한 것인가 보다고 마음을 돌렸다. 그런데 왜 꽃씨 봉투에는 다른 사진을 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의 꽃 색깔을 사진에 실으면 팔리지 않았을까봐 그랬을까. 정직하게 살자고 다짐하지만 속아야 되는 현실이 실망스럽다.

가끔 과일선물을 받는다. 잘 담긴 상품도 있지만, 위만 번듯하고 아래에 있는 과일은 작거나 썩고 멍이 들어 있는 것도 있다. 좋은 것만 골라 차라리 더 비싼 값을 받고 팔던지, 아니면 그만 못한 것은 조금 싸게 팔던지. 상도라는 말이 설자리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꼭 나팔 꽃씨를 속아서 산 것과 같은 마음이 든다.

나팔꽃은 사방에서 왕성하게 자라, 많은 꽃을 피우고 잘 버티고 있다. 그 좋아하던 야생 푸른 나팔꽃이 왜 그리 섭섭했는지 아직도 마음의 수양이 덜 된 모양이다. 자연에서 마음대로 자라고 피는 나팔꽃을 편안하게 살도록 그대로 두고 감상하면 되지. 인간의 잣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꽃을 폄하하는 것이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

여기저기에 피고 지는 파란색의 나팔꽃에는 부모형제 모습이 담겨있고 추억이 묻어있다. 종묘상은 이런 내 마음을 헤아려서 빨간 꽃을 그린 봉지에 토종나팔꽃 씨를 넣었을까.

이것저것 생각할 일이 많을 때면 울안을 서성이면서 어렸을 때부터 정을 주고 받은 파란 나팔꽃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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