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호의 시선(視線)] 세상 모르고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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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호의 시선(視線)] 세상 모르고 살았을까
  • 김연호  dusghkim@nate.com
  • 승인 2024.01.1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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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호 수원시노사민정협의회 사무국장
김연호 수원시노사민정협의회 사무국장

| 중앙신문=김연호 |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지금은 음악방송 진행자로 널리 알려진 배철수가 한국항공대 밴드인 런웨이(활주로의 전신)의 리더로 1978년 해변가요제에서 부른 노래 제목이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80년대 청년들의 답답함을 대변했던 노래로 리듬 자체는 신나는 록음악이지만, 김소월의 시를 개사한 노랫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 고유의 한과 슬픔을 노래한 시인 김소월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편 과다 복용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김소월에게 그 시대는 ‘세상모르고 살아가기’를 강요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탁월한 감성을 보유한 천재 시인 김소월이 그 시절 세상사를 모를 리 없겠지만, 그는 끝끝내 ‘세상모르고 살아가기’를 선택한 슬픈 시인이었다.

혹시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 ‘세상모르고 살아가기’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자기가 살아온 시절이 가장 힘들었고 역사적으로도 가장 의미가 있으며 이 세상을 가장 잘 알기에 다른 세대는 이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정 세대가 우월적 세대 의식을 갖고 다른 세대에게 ‘세상모르고 살아가기’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되돌아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4년 4월에 치러질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9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총선 시기마다 정치권에서 특정 세대를 겨냥한 세대교체론은 단골 메뉴로 등장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그 정도가 다르다. 집권 여당의 대표격인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야당의 정치세력을 86운동권 출신의 기득권 집단으로 규정짓고, 이번 선거에서 86세대를 퇴출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일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특정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 아니다. 86세대 전체를 겨냥한 정치적 발언이다. 여당 대표가 86운동권을 적폐 세력으로 단정 짓고 86세대의 퇴출론을 들고나온 이유는 명확하다. 이번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선거 전략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공천을 앞두고 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고 용퇴론을 주장하는 정치인도 있다. 선거 시즌에 대두되는 86세대 퇴진론에 대해 필자가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86세대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내부자의 입장에서 성찰할 필요가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이 언론에서 386세대라는 타이틀을 부여받고 정치권에 들어온 시기는 1990년대 초중반 정도이다. 그 당시에도 보수 진영에서는 “공부는 안 하고 학생운동하다 감옥 갔다 온 훈장 달랑 하나 들고 정치권에 너무 쉽게 들어왔다”라는 비판은 있었지만, 범민주 진영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며 86세대의 등장을 반겼고 기성 정치인에 비해 쉽게 여의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86세대 정치인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무기는 헌신성과 선명성이었다. 지금은 철 지난 이야기지만 1980년대 운동권 그룹 내부에서는 그들만의 치열한 노선투쟁이 있었고, 학생운동 현장에서도 대중조직으로 나아가는 데 한계를 드러내곤 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86세대 활동가들은 민주주의 운동 선배인 4.19세대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그들 스스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4.19세대도 연대와 예우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후배 세대에 대한 평가는 더 박했다. 민주화된 세상에서 편하게 살았고, 선배들의 성과물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실제로 86세대가 선배와 후배 세대를 교육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선배와 후배 세대의 입장에서 아직도 86세대가 우리를 교육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언론과 정치권에서 과도한 86세대 때리기가 지속적으로 있어왔고, 일부 86세대 정치인의 부적절한 행태와 도덕적 타락도 86세대가 고립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사실 86세대 입장에서는 많이 억울하겠지만, 86세대를 제외한 다른 세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언론 탓만 하지 말고 후배 세대의 입장을 헤아려 보자. 86세대와 마찬가지로 X세대와 MZ세대도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알아가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시인 김소월처럼 세상을 모르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1980년대가 ‘세상모르고 살아가기’를 강요받은 시대였던 점은 분명하다. 국가기관에 항의하는 민주시민보다는 말 잘 듣는 소시민으로, 당당한 노동자보다는 성실한 근로자로 살아가기를 강요받았다. 세상모르고 살아가라고 강요받았던 1980년대의 유산을 다른 세대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2024년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세상이기를 바라며, 정치권에서 각개전투하며 이제는 동네북으로 전락한 86세대 정치인이 분발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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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모르고살고싶소 2024-01-10 17:27:48
나야말로 요즘 같아선 다른 의미로 세상 모르고 살고싶다.

87학번 2024-01-10 17:26:16
필자님덕에 이 사회를, 정치를 보는 눈이 좀 키워지는듯.

댓글달기쉽게 2024-01-10 17:14:01
김소월님의 시인줄 첨 알게되었네요
수십년이 지나 읽어도 감동입니다

뚜뚜루 2024-01-10 14:33:23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응원합니다.

유리 2024-01-10 13:41:46
서울의 봄을 보면서 와 닿았던 느낌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는 식민통치와 전쟁까지...우리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경쟁하는...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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