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가방
상태바
내 인생의 가방
  • 중앙신문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8.05.24 17:0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년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형형색색의 예쁜 가방을 멘 어린학생들을 보면 초등학교시절 내 책가방이 생각난다. 나는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싸서 어깨에 메거나 허리에 묶고 다녔다. 고학년이 되면 책보 부피가 커지니까 메거나 묶을 수가 없어 들고 다녀야 했다.

6. 25 전쟁 때 피난 온 어느 아이가 가죽가방을 메고 다니는데 그게 몹시 부러워 가방을 사 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는데 돈도 문제지만 여주읍내에 그런 가방이 없으니까 어머니는 무명천으로 끈을 달아 어깨에 대각선으로 메고 다니게 책가방을 만드셨다. 이리 저리 궁리를 하시며 재봉틀에서 수고를 하신 어머니의 정성은 맘에 안 든다고 심통을 부리는 통에 물거품이 되었고 가방은 동생차지가 되었다. 서울아이의 네모진 가죽가방이 부러웠던 내게 어머니가 만드신 무명천 가방은 성에 차지 않아 동생에게 주어 버린 것이다.

어느 때 인가 어머니에게도 핸드백이 생겼다. 번쩍거리는 검은 비닐로 만든 어머니의 핸드백. 평생을 두고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어머니의 가방. 아마 중학생 때이었던 것 같다. 그 핸드백을 드신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 외면했었다.

그 핸드백에 무엇이 들었는지, 그 핸드백이 왜 필요한지 보따리만 눈에 익었던 내게 어설프기만 한 가방. 여주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그 가방에서 몇 알 눈깔사탕을 쏟아 놓으셨다. 어린 우리들은 처음 보는 사탕에 서로 색깔 예쁜 걸 고르느라고 싸움질을 했으니... 어머니인들 그 사탕이 왜 잡숫고 싶지 않았겠는가. 한 번 권하지도 않고 내 욕심만 채운 게 60년이 지나도 동생들과 어머니께 미안하다.

보자기에 싸서 보따리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게 전부였던 시절이 가고 이제는 가방이 대세이다. 이름도 모두 영어내지 외래어로 되어 있다. 인종과 사람 수가 많듯 가방의 종류도 많고 기능과 모양이 다양해 눈이 부시다.

내 나이가 많이 늘어난 것처럼 나를 거쳐 간 가방의 숫자도 엄청 많다. 학창시절의 책가방을 빼고도 대학시절 등산용 가방이던 키슬링, 군 복무시절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 신혼여행을 함께 갔던 트렁크, 직장 생활 때의 서류가방, 없어지고 망가지고 내 옆에는 지금 몇 개 안되는 가방들이 먼지를 뒤집어쓰며 외출을 기다린다.

70년대 말 일본 여행길에 007가방이라는 삼소나이트 서류가방을 하나 샀다. 폼 나게 들고 다니고 싶어 사기는 했지만 넣고 다닐게 없어 월간지나 신문, 담배, 라이터를 넣고 다녔으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린애였다. 동창 모임의 총무 일을 볼 때여서 모임 서류를 담아 두었다가 후임총무에게 가방채로 넘겼는데 꽤 비싸게 샀던 그 삼소나이트 가방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나의 생활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가방들 속에 담겨있던 나의 인생도 숨결도 함께 흘러가 버렸다. 이제 생각하니 그 속에 내 인생이 녹아 있고 내 가족의 생명이 들어 있었는데 귀하게 대접하지 않고 싫증나거나 헐어지면 미안한 기색도 없이 바꾸어 버렸다.

가방이라는 게 잡다한 여러 가지 물건을 한곳에 모아 쉽게 운반하는 용기이니 수납성이 좋고 편해야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여인의 신분을 상징하고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 돼버렸다. 그래서 가방의 종류가 많아지고 재질도 천차만별이 되는가 보다. 어느 보도를 보니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명품가방을 갖게 되는 이유로 자기 과시를 위해서, 남들이 갖고 있으니 따라서 구입한다고 하며 여성 평균 9개나 갖고 있다고 한다. 어느 게 명품인지 왜 명품을 가져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명품 가방 하나 없어도 세상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명품가방 하나 못 사준 나의 아내와 딸, 며느리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학력 낮음을 가방끈이 짧다고 비유하는 어느 여인의 독백, 가방끈이 짧으면 어떠한가. 가방끈 길다고 모두 사람다운 사람인가. 여인이여, B.C 9세기부터 가방이 생겨난 이래 가방을 지녔다가 스러져 간 수도 없는 군상들, 지금이나 그때나 그들의 가방끈도 짧았습니다.

지금까지 ‘가방’이 순수 우리말인 줄 알고 지내 왔는데 천만의 말씀, ‘캬반’이라는 중국어에서 왔고 캬반은 ‘카바스’라는 네덜란드 말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말과 ‘가반’ 이라는 일본어에서 왔다는 말이 있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무식이 탄로 났다. 순 우리말로 가방에게 이름을 지어주면 어떨까 했는데, 이를 어쩌나. 국립국어원에서 우리말로 인정해 버렸다니.

무겁고 안쓰러운 나의 삶을 담고 곁에서 지팡이가 되어주던 내 인생의 가방들, 지금은 흔적도 없는 가방을 위해 고마움과 미안함을 갖고 위령제라도 지내야 할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단독] 3년차 의정부시청 여성 공무원 숨진 채 발견
  • 박정 후보 유세장에 배우 유동근氏 지원...‘몰빵’으로 꼭 3선에 당선시켜 달라 ‘간청’
  • 감사원 감사 유보, 3년 만에 김포한강시네폴리스 산단 공급
  • [오늘 날씨] 경기·인천(20일, 토)...낮부터 밤 사이 ‘비’
  • [오늘 날씨] 경기·인천(24일, 수)...돌풍·천둥·번개 동반 비, 최대 30㎜
  • 1호선 의왕~당정역 선로에 80대 남성 무단진입…숨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