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커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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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커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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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9.0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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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다방 구석진 곳에 검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학생이 책가방과 모자를 옆에 미루어 둔 채 두리번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잔에 커피가루를 한 스푼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연유(加糖煉乳)로 단맛을 맞춘다.

촌수가 먼 일가 누나가 다방에 근무하면서 나는 본의 아니게 다방 출입을 하였는데, 누나의 심부름꾼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부름으로 다방에 들르면 누나는 당연히 커피를 달게 타주고, 돌아갈 때는 버스비의 몇 배 용돈을 주니 가난한 시골 유학생이었던 나는 누나의 심부름을 기다리게 되었다. 누나는 가끔 홍차도 타 주었는데, 당시 홍차에는 위스키 몇 방울을 넣어 ‘위티’라고 불렀다. 누나의 동료들은 내 홍차 잔에 위스키를 넣어 장난을 하였다.

친구들 보다 일찍 다방출입을 하였고 위스키를 마신 셈이다. 커피가 무엇인지, 왜 마시는지, 입맛에 맞지도 않는 검은 물과 친해지기는 한 참후의 일이다. 지금도 을지로 6가 ‘야자수다방’ 서울대병원 구내다방 등 누나의 근무처였던 다방이 눈에 선하다. 누나는 30여 년 전 자녀를 따라 미국에 이민을 갔는데 나이가 80이니 안부가 궁금하다.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실업자, 외국잡지를 끼고 거들먹거리던 가짜대학생, 그들을 비집고 양담배며 소품을 팔던 잡상인, 50년대, 60년대의 다방풍경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가난했던 시절 연인들은 데이트 장소가 다방이었고, 커피 잔을 통해 정이 오갔고 사랑이 커갔으려니. 누구를 만나야 한다면 의례 다방이었다. 다방은 다양한 사람들의 쉼터다. 그 곳에는 거친 삶을 사는 ‘흙수저’들도 거리낌 없이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어 좋았다. 빈부귀천이 커피에 녹아 커피가 중간다리가 되었고 지금도 커피는 다방의 주 메뉴이다.

1961년 5월 29일 서울 시내 다방 1,150곳에서 커피가 자취를 감추었다. 군사혁명당국이 커피와 양담배를 외화낭비와 사치의 주범으로 몰아 판매금지 조치를 단행했던 것. 그러나 ‘오 갈 데 없는 실업자들이 다방에 죽치고 앉아 커피 한 잔을 놓고 잡담을 하고, 천하를 뒤흔들겠다는 공리공론을 늘어놓는 비현실적인 풍조’에 칼을 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1960년의 다방은 전국에 2,800곳이 있었는데 오늘의 다방(커피전문점)은 전국에 5만 곳 가깝다고 하니 커피와 우리 생활의 밀접도를 알만하다. 목 좋은 곳은 약국이나 전자제품 대리점이었는데 이제는 커피전문점이 자리하고, 풍광 좋은 시골길에는 무슨무슨 카페가 자리를 틀었다. 당시 서울 시민들이 한 해 25잔 꼴로 마셨는데, 작년 1인당 커피 소비는 484잔으로 폭증했단다. 이것도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 식당에서 식사 후 서비스로 주는 공짜 커피, 사무실에서 접대용으로 비치한 커피, 가정에서 보유하며 즐기는 커피까지 합치면 보통사람들도 1년에 1,000잔은 마실 것 같다.

세월 따라 커피문화도 확 바뀌었다.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등등 유명 커피가 수 십 종이요, 용기도 커피 잔 셋트는 옛말이고 머그잔에서 1회용 종이컵에, 뚜껑을 덮고 빨대를 꼽는 휴대용까지 분화되고 있으니 너무 달라졌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커피, 프림, 설탕을 섞어 한 봉지에 담은 싸구려에서 전문점 커피는 보통 5천원이나 하고, 호텔 커피점은 1만원을 넘긴다.

커피의 맛에는 그윽함이 있다.

커피의 향에는 못다 이룬 젊은 그들, 사랑의 아련함이 배어 있다.

커피문화는 시골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마을회관이나 동네 노인정에는 종이컵과 봉지커피가 항상 준비되어 누구나 손쉽게 커피를 마신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커피문화가 산골마을까지 점령해버렸다. 그늘 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땀을 식히던 농부들도 이제는 대신 커피를 마신다.

40년 전 담배를 끊으려는데 쉽지 않았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담배를 피웠는데, 궁리궁리 하다가 커피로 대신한 것이다. 담배 생각이 나면 커피를 마셨는데, 그때 습관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늘도 식전에 커피를 마신다. 머그잔에 블랙커피를 한 잔 가득타서 사랑채 바깥 마루에 아내와 마주 앉아 동네 풍경을 감상하며, 아내 한 모금 나 한 모금 번갈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의 커피문화이다.

술꾼이 안주와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듯 나도 커피의 종류를 따지지 않고 마셨는데, 몇 해 전 콜레스테롤 검사를 받은 후 의사의 권유로 프림이 들어간 커피는 멀리하였다. 얼마 전 친구로부터 커피가 심장병에 안 좋다는 유명 교수의 이야기를 카톡으로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교수는 예전에 잘 알고 지내던 분이라 직접 물어 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어느 의사는 커피를 하루에 몇 잔 마시는 건 몸에 좋다고 하고, 어느 분은 건강에 나쁘다고 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나. 담배 끊고 술까지 줄였는데, 커피까지 못 마시면 무슨 기호식품이 내게 남을까.

친구들과 어울려 장터 후미진 다방에 들른다. 중국에서 건 온 교포 아줌마들의 눈웃음을 받으며 커피를 시킨다. “나, 커피. 블랙으로 양 좀 넉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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