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농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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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농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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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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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여름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오면 아버지와 나는 바싹 마른 개울 바닥을 파서 물길을 내고 가뭄에 목이마른 논에 물을 대었다. 관개시설이 전혀 없던 당시 농부들은 하늘만 쳐다보았다. 벌써 50년 전 이야기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여주강물을 퍼 올려 논에 물을 대고는 근심걱정이 해결되었는데 올해 같은 가뭄에는 밭작물이 큰 문제이다.
오늘도 나는 비닐호스를 끌고 다니며 밭에 물을 뿌린다. 며칠 전 아침, 수돗물을 트는데 물줄기가 시원치 않다. 이장 일을 보는 동생에게 얘기하니 동네상수도 지하수도 가뭄을 타서 고갈인데 아래쪽 주민들이 수돗물을 밭에다 주어 윗동네는 수압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도 그런 적이 많아 깜짝 놀라 예전에 쓰던 지하수 모터를 손보아 물을 퍼 올려 밭에 주고 있는 것.
시골에 내려 온지 10년이 넘었지만 처음 몇 년은 사슴농장을 하였고, 논농사는 동생이 대신 짓고, 큰 밭은 인삼밭으로 임대하여 나는 농사꾼도 아니다.
집터 천 여 평 중에 이곳저곳 흩어진 조각 밭들에 직접 작물을 심는데 말이 농사지 아이들 소꿉장난이다. 삼 백 여 평 되는 밭은 의례 풀밭이어서 풀을 매는  아내의 노고가 크다. 먹을거리라고 제초제, 화학비료, 농약을 덜 쓰니 우리 밭은 동네에서 제일가는 풀밭이다.
작년 겨울 스물 댓 평되는 비닐하우스를 지은 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몇 년간 고추를 심었지만 병충해로 모종 값도 못 건지다가 하우스에 고추 모 180포기를 심었는데, 굵고 기다란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동네 친구들, 이웃들의 덕담이 쏟아진다. 노지에 심는 것 보다 하우스에 심으면 빗물에 따른 병해가 덜 하다더니 그런가 보다. 달려야 얼마나 달렸겠으며 잘 됐어도 아마추어 실력에 얼마나 잘 됐겠나. 지나가는 얘기겠지, 그래도 아내는 신이 난다. 고추는 발갛게 익어 모두 따낸 다음 잘 말려야 끝나는 것이니 아직은 시작도 아닌 것을...
하우스 가장자리에 옥수수, 브루클리, 오이, 상추, 얼가리 배추, 시금치, 완두콩을 잔뜩 심고, 웃 밭에는 땅콩, 동부콩, 옥수수, 서리태, 대파, 쪽파, 호박, 조롱박, 아는 작물은 모두 심어 조그만 식물원을 만들었다. 감자를 다섯 두럭 심고 때가 되어 캐기는 했는데, 가물어서인가 소출이 작년만 못하다. 마늘도 마찬가지, 스무 접은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열세접이 나왔으니 씨 남기면 먹을 것도 없다고 아우성이다.
아내는 손녀 손자 불러다가 농사교육, 현장학습도 시키고 농사일의 어려움을 가르치려 했는데 한 놈도 안 왔다고 감자 마늘 한 개도 안주겠다고 푸념이더니 주섬주섬 아들 딸 삼남매에게 줄 거라고 몫을 나눈다.
가뜩이나 날이 가물어 작물이 마르고 성장이 멈추고 잎이 오그라드니 내가 심고 풀을 매고 정성을 다 했는데 너무 억울하다. 비닐 호스를 끌어내 물을 주려는데 길이가 짧다. 호스를 한 둥치 더 사다가 잇고 땅콩 밭, 옥수수, 마늘 밭에 물을 주는데 지나는 동네 사람들, 땅콩 밭에는 주지 말고 옥수수에는 흠뻑 주라고 지도한다. 비 소식은 없고 작물은 타 들어가니 이럴 때는 과학영농의 효험도 떨어진다.
모든 문화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해 가듯이 농사의 세계도 나날이 변하기 때문에 융통성이나 요령이 필요한데 우리네 초보는 영 힘이 들어 따라가기 어렵다.
물을 받아먹는 작물이 생기를 되찾으면 그게 좋아 물 주는데 더 열심이다.
수확기가 되어 들깨를 떨고 콩을 떨고 김장배추를 다듬어 들이고, 가을걷이가 끝날 때 아내의 고통은 절정이다. 혼자만 농사를 짓는 것처럼 말하며,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 고생이냐, 내년부터는 한 가지도 안 심는다고 다짐을 하지만, 봄이 되기도 전에 이것저것 아는 대로 이 밭에는 이것저것, 저 밭에는 이것저것, 심을 궁리를 하는데, 그 종류가 열 대 여섯 가지나 된다.
시골도 예전과 달라서 품앗이나 두레가 없어지고 가족단위로 농사일을 하다 보니 농심이 메마르고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서 신이 날 수가 없다.
비닐, 종자, 농약, 제초제, 비료, 농기구, 농기계, 어느 것 하나도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어 있는데 값이 적정하지 않은 것 같다. 이것저것 몇 가지 사다보면 주머니기 빈다. 그들은 부동산을 사 들이고 외국으로 골프 여행을 다니는데, 농사꾼들은 비지땀을 흘리며 애써봐야 빈주먹이다.
시름시름 시들어 가는 자식 같은 농작물을 바라보는 초보농부의 가슴에도 서서히 멍이 들기 시작 한다.
비야 좀 와라. 비야 좀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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