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기획] 우리가 몰랐던 우리나라 해양 국방유적....인천 강화도 ‘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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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기획] 우리가 몰랐던 우리나라 해양 국방유적....인천 강화도 ‘돈대’
  • 이복수 기자  bslee9266@hanmail.net
  • 승인 2021.12.07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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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산지 전망 좋은 곳 설치한 옛 군사시설물
숙종 5년 외적 침입·감시·방어 위해 총 53개 축조
일부 ‘돈대 주변 사유지...정비·관리 어려움 많아’
6일 오후 1시 40분께 인천 강화도의 화도돈대. (사진=김광섭 기자)
12월 6일 오후 1시 40분께 인천 강화도의 화도돈대. 아래 사진은 지난 6월 모습. (사진=김광섭 기자)
342년 전 만든 대부분의 돈대 밖은 절벽처럼 깎아 적의 침입에 대비했지만, 현재의 돈대주변은 예전과 달리 각종 나무들이 자라 숲이 만들어진 상태다. (사진=김광섭 기자)
6월 22일 화도돈대. 342년 전 만든 대부분의 돈대 밖은 절벽처럼 깎아 적의 침입에 대비했지만, 현재의 돈대주변은 예전과 달리 각종 나무들이 자라 숲이 만들어진 상태다. (사진=김광섭 기자)

| 중앙신문=이복수 기자 |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강화도 지역은 그 이름에 걸맞게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특히 내륙지역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국방유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강화지역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강화지역은 한반도 중앙의 큰 물줄기인 한강, 예성강, 임진강 등 주요 하천의 하구에 위치하고 서해 연안항로의 통과지에 자리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어 시대마다 주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했다.

19세기 들어 강화지역은 조선이 서구 세력과의 만남에서 최일선에 자리했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이 강화읍을 점령하기도 했으며, 신미양요 때는 미군에 의해 광성보와 덕진진이 함락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화 전역에 있는 돈대와 같은 국방유적은 중요성과 비교해 발굴 등 체계적인 조사가 부족해 관련 유적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적잖으며, 일부 시설을 제외하고는 관광지로써 활용도 역시 부족하다. 본보는 강화의 대표적 국방유적인 돈대의 역사와 현황, 현대사회에 이르러 부족한 관리실태 등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편집자 주-

# 조선시대에 대거 축조된 돈대

강화도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각각 겪으면서 유사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왕실과 조정이 피난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보장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에 강화지역에 왕실의 행궁 등 국가 주요 시설이 들어섰다. 또 내륙으로부터 강화를 방어하기 위한 외성과 돈대 등 다양한 군사시설이 건설됐다. 앞으로 언급할 강화지역 돈대 대부분은 조선 숙종 때 건설된 것이다.

강화에 각종 방어시설이 차례로 설치된 계기는 병자호란 때 강화가 청나라군에 의해 함락당한 사건이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이 편찬한 강화의 국방유적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강화 함락 이유를 적의 상륙을 막아 내지 못한 것으로 분석하고 강화의 군사 지휘체계를 경기수사 수군 중심에서 강화유수의 육군 중심으로 전환했다.

성곽과 돈대를 본격적으로 축조한 것은 숙종부터다. 조선 정부는 숙종 3년 강화 부성을 석축으로 개축했으며, 이어 숙종 5년에는 강화도 해안지역의 요지에 적의 상륙을 감시, 방어하기 위해 돈대를 쌓았다. 돈대는 처음 49개를 계획했지만, 실제로는 48개 돈대만 쌓았다. 이후 검암, 작성 등 5개 돈대가 추가되면서 모두 53개 돈대가 축조되었다.

강옥엽 전 인천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현 인천여성사연구소 소장)강화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시작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발발하는 등 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임금이 몽진하기 위한 장소로 인식된 곳이라며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군사적 준비가 조선시대에 마무리됐다. 그렇다 보니 진보를 비롯해 돈대 등 관방유적이 많이 남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전망 좋은 곳에 설치한 돈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이나 침입을 관찰하여 경보하거나, 침입하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가 또는 산지 등 전망이 좋은 곳에 설치한 군사시설물이다. 돈대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요동 지방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조선 숙종 때 강화지역에 본격적으로 축조됐다.

강화지역에 돈대 설치의 필요성은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에 의해 제기됐다. 이에 숙종 5(1679)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 아래 돈대가 축조됐다. 당시 강화도 지역 돈대 축조는 함경도와 황해도, 강원도에 주둔하던 승군 8900명과 어영군 4300명 등 15천 명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 80일 만에 완성했다. 당시 축조된 돈대는 48개인데, 이후 영조 때까지 5개의 돈대가 추가로 설치되면서 지금 강화지역에 남아있는 돈대 53개가 모두 완성됐다.

강화지역 돈대는 해안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이후 영조 때까지 5개의 돈대가 추가 건설돼 조선 후기 강화도의 돈대는 모두 53개가 축조된 것으로 집계된다. 돈대는 군사적으로 감시와 방어가 유리한 지형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돈대 자리에는 오늘날에도 군부대가 주둔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지형 특성은 향후 돈대 활용에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조선 정부는 돈대를 2~4개씩 단위로 12진부에 소속시켜 관할하였다. 진과 보는 조선시대의 행정단위라고 이해하면 된다. 첨사(3), 만호(4)가 파견된 곳이 진이며, 별장(9)이 파견된 곳은 보이다. 강화에는 모두 12곳의 진과 보가 있어 통상 12진보라고 말한다.

각 돈대의 평면 형태는 방형과 원형이 대부분이다. 가끔 타원형 돈대도 있다. 돈대 하층에는 3~4기의 포좌를 두고 위층에는 치첩을 쌓아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돈대의 내부에는 병사들이 머무를 건물을 설치했지만, 현재 지표상에 남아있는 곳은 없다.

돈대에는 병사를 상주시켜 무기와 성벽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를 돈군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여지도서, 강화 부지에 따르면 돈군의 수는 모두 366명으로 돈대당 6명이 배치됐다. 동검북 돈대에는 60명이 배치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 쉽지 않았던 돈대 축성 공사

숙종 5(1679) 본격적인 돈대 축성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예측하지 못한 지연 상황이 속출했다. 특히 인력 충원 문제와 더불어 개펄을 메우고 돈대를 세워야 하는 곳이 많아 애초 계획했던 공사 기간에 차질을 빚었다.

숙종실록, 비변사등록 등에 따르면 인력 문제는 당시 돈대 건설을 총괄한 병조판서 김석주의 건의로 승군을 추가 배치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낙성, 장자평, 망월돈대 등 지리상 갯골에 있는 돈대는 석재로 진흙을 메우고 석축을 쌓아야 했기에 인력이 두 배나 들었다.

돈대는 축성 공사 시작 80여 일 만에 강화유수 윤이제가 숙종에게 돈대 축성의 역사가 종료됐음을 보고하면서 마무리됐다. 병조판서 김석주가 강화도 돈대 48좌를 그린 족자를 바쳐 올리면서 최종보고가 마무리됐다.

기록에 의하면 돈대 축성에 동원된 총인력은 순수 역부만 12263명이며, 여기에 각종 장인과 조수를 더하면 14천 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숙종 때 강화의 인구가 22336명이었고, 비슷한 시기 개성의 대응산성 축조에 6100명이 투입한 것과 비교하면 당시 돈대 공사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특히 공사 과정에서 한 달 만에 준비한 식량 8천 섬이 모두 소진됐다고 기록됐는데, 이를 보충하기 위해 강도미 2천섬이 추가로 지급됐으며, 어영군이 소비한 강도미 2800섬을 더하면 공사 과정에서 소비된 식량이 12800섬으로 엄청난 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6일 오후 멀리서 바라본 화도돈대. 아래 사진은 지난 6월 화도돈대 모습.
멀리서 본 화도돈대.
지난 6월 22일 멀리서 바라본 화도돈대 모습.

# 문화재 지정 여부에 따라 돈대 관리 천차만별

현대에 이르러 돈대 관리는 지정문화재냐 아니냐 여부로 관리실태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강화군에 따르면 현재 문서상으로 관리하는 강화지역 54개 돈대 중 국가 및 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극히 일부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무태돈대, 망월돈대, 검암돈대, 화도돈대,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삼암돈대, 망양돈대, 건평돈대, 굴암돈대, 분오리돈대, 후애돈대 등을 제외하면 이른바 비지정문화재(속칭 매장문화재)로 분류된다. 지정문화재의 경우 국가나 인천시가 관리비용을 책정하고 있어 진입로 정비 등 그나마 관리가 이뤄지지만, 비지정문화재의 경우 기초지자체인 강화군에서 관리를 맡아야 해 대조를 보인다.

상대적으로 예산이 부족한 강화군 입장에서는 돈대 관리를 위한 별도의 예산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화군 문화관광과 문화재팀 관계자는 돈대 주변 필지가 국유지(특히 기재부나 산림청), 군유지인 경우도 있지만, 일반 사유지인 경우도 많다별도의 토지매입비를 책정할 수 없어 보수공사나 진입로 정비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강화의 국방유적 돈대 현황표. (사진제공=인천광역시립박물관)
강화의 국방유적 돈대 현황표. (사진제공=인천광역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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