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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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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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1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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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해맑은 얼굴이다. 반갑다.

참 오랜만이에요. 예, 오랜만입니다. 지금은 어디 계시지요. 예전처럼 Y시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그가 누군지, 이름이 뭔지, 성씨가 무엇인지 알 수 가 없다. 생각이 안 난다.

‘이럴 수가.’

누구인지. 어디서 만나, 무얼 했었는지, 어떻게 친해지고 다정다감했는지. 꼬치꼬치 물어나 볼 걸. 그러나 내 기억 속에 그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감지해 더욱 섭섭해할 것만 같아 얼른 접었다.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 던져 기억을 더듬는다.

친한 친구에서 옷깃만 스쳤던 사람까지. 아내와 아들과 동생들, 그리고 친척과 사돈의 팔촌. 직장에서 직장으로. 대학에서 초등학교까지. 낡은 군대생활 전반까지 뒤져, 기억의 파장은 하염없이 퍼지건만 감이 잡히지 않는다.

― 누굴까. 사흘째 뒤지고 털어보고 쓸어보지만, 흔적은 찾을 길 없다.

― 누굴까. 내 나이 60. 기억력이 쇠(衰)했나. 장모님이 그러셨던가.

장모님이 회갑 몇 년 지났을 때. 예전에 칭찬하고 자랑하며 애지중지 하시던 먼촌 아저씨를 만났건만 생면부지 대하듯 매몰차게 돌아서셨다. 주위의 아들딸, 며느리, 사위, 손자까지 나서서 “왜 그분을 모르시느냐”고 다그쳤지만 딱 잡아떼셨다. 장모님의 기억은 그 날로 아저씨를 영영 기억하지 못하셨다.

내가 그 날의 장모님이 되는 걸까.

장모님의 망각이 두려워 생각의 늪을 훑는다. 저인망으로 시작해 삼중자망, 후릿그물, 트롤망, 통발, 촉구, 족대까지 동원해 헤집어 본다. 없다.

낚시대를 드리운다. 릴낚시, 대낚, 낚시란 낚싯대 몽땅 던져놓고 기다린다. 은빛 퍼덕이며 솟아오를 기억한 조각 찾자고.

체코의 국민작가 차페크의 소설 ‘유성’의 3번째 해석, 시인이 쓴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쫓기는 사람이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쫓는 자를 총 쏘아 죽이고, 그 또한 쫓는 자의 칼에 맞아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는다. 그는 텅 빈 기억에 새로운 인생을 담는다. 10년 뒤 막강한 부(富)를 축척하고 아리따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고 더 많은 부를 찾아 떠난 미개척지에서 운 사납게 돈과 건강과 모든 것을 잃는다. 애인에게 편지를 쓴다. 모든 것을 잃었노라. 기다리지마라. 끝장난 인생이다. 그대로 인하여 내 인생 아름다웠노라.

편지 말미에 싸인을 한다. 무의식중에 써진 이름. 10여 년 만에 써진 이름. 싸인 하나로 잊혀진 자아를 되찾는다. 이처럼 사소한 무의식의 행위가 잃어버린 기억을 한꺼번에 끌어내는 수도 있다.

그가 존재했던 텅 빈 방하나. 투명한 기억의 공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름이 사라진 그가 울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의 소설이다. 평생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교수로부터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전수 받는다. 서서히 셰익스피어의 기억이 머리 속에 재생되고, 자신의 기억과 혼재하여 섞이고 뒤척인다. 문제는 셰익스피어의 기억이 증가하면서 내 기억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급기야 머리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기억이 나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참다 못해 무작위로 전화를 돌려 응답하는 사람에게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제공하고 내 기억을 되찾는다.

이와 같이 기억 용량엔 한계가 있고, 퇴직한 3년 전의 내 자리는 누군가로 채워진 것처럼 언젠가 내가 죽어 떠난 빈 자리도 누군가가 채울 것이다.

낚시대를 거둔다.

나 또한 타인의 기억 속에 지워짐을 애석해하거나 노여워할 일이 아니다.

나로 인해 더럽혀진 타인의 기억의 방이 말끔히 비워지기를.

그리하여 싱싱한 기억의 방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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