끗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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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2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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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주차료(駐車料) 기피증이 있다.

기십만 원 하는 술값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내가 30분에 500원 하는 주차료 앞엔 콩나물이 몇 개냐를 따지며 요리조리 피해 불법 주차를 한다. 공무원으로 교통행정계장까지 지낸 놈이 이 모양이니 다른 사람의 심정은 오죽하랴.

오늘도 돈 안 낼 요량으로 무임(無賃) 주차할 곳을 찾아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세울 자리가 마땅찮아 ‘에라 모르겠다’ 유료주차장에 세우니 징수원이 아는 사람이다. 반색을 하며 주차료 딱지는 붙일 생각도 않는다.

“붙여요.”

“별 말씀을, 내가 좋아하는 분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데…. 내 구역에서 손님에게 돈 안 받겠다는데, 누가 뭐래요” 하며 주차한 것을 오히려 고마워한다.

살다보니…. 아는 것이 끗발이구나.

이모부의 다리 골절상으로 사촌이 밤새워 나를 찾았다. 의료보험 제도 초창기에 보험료가 적잖은 부담이라 연체하기 일쑤다. 그 연체로 입원할 경우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 큰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적자가 무서워 의료보험 조합엔 얼씬도 못하고 공부원인 내게 막강한 힘을 있으려니 하고 찾은 것이다. 다음 날 조합에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밀렸던 보험료만 내면 될 것을 미리 겁부터 먹은 것이다. 사실을 일러주고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되는 것이라고 설명해도 ‘공무원 힘’이라며 “아는 사람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을 수 없다”며 고마워한다.

“아냐, 나는 도와준 것 하나도 없어.”

목사님이 군청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고민거리를 해결하려 기웃거리다 복도에서 나와 마주쳤다. 이러저러한 일로 찾아왔는데 어디로 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 해당과에 찾아가 담당자에게 소개시켜 주니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며 고마워하신다.

“목사님, 열 명의 형리를 사귀려 말고 한 가지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디에 있는 말이지요.”

“성경이요.”

목사님 앞에서 감히 성경을 들먹여 훈계를 하다니.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니 끗발에 지쳤다. 끗발로 밀고 들어오면 진절머리가 난다. 높은 분 이름을 들먹여 청탁이고 부탁이니, 공무원도 끗발 대 끗발로 싸울 양이면 끗발이고 있고 볼 일이다. 선후배, 정치인, 검?경찰, 법원, 신문기자, 환경단체…. 힘깨나 있는 놈치고 끗발 안 부리는 놈이 없다.

끗발은 겸손을 모른다. 안하무인이다. 경찰관 승용차 불법주차 딱지를 떼고 봐달라는 것을 안 봐 주더니, 3일 동안 군청 정문에서 지키고 있다가 퇴근하는 내가 안전벨트를 안 맸다고 울타리 안에서 딱지를 떼곤 직성이 풀렸는지, 어느 틈에 사라졌다.

군수님이 ○○화물 주차장 허가를 잘 처리해 보라고 한다. 현지 조사에 군수에게 “양심상 안 되겠습니다” 하니 일언직하에 “없던 걸로 합시다”라고 해, 고맙다 못해 존경스러웠다.

끗발이 보기 싫어 끗발을 피해 다녔다. 20여 년 끗발을 도외시했으니 끗발이 있을 리 없다.

아들 셋을 군대 보낼 때만다 “아비가 공무원이라 힘 있으려니 생각지마라. 끗발 없다. 군대생활 네 능력껏 견뎌라” 하고 보냈더니 큰놈은 군종(軍宗)으로 둘째는 장성급 끗발만 들어간다는 곳에서, 막내는 의경으로 졸병 생활을 집 근처 파출소에서 한다.

말단 공무원이며, 공군 하사관 출신인 내가, 어찌 군목(軍牧)이나 육군 장성, 경찰 간부를 알아 끗발을 부리랴. 간혹 아내가

“당신 아는 데 없어요. 그 얘들이 어떻게 좋은 델 갔을까.”

“내가 무슨 끗발이 있어. 당신이나 그 얘들이 예수를 믿으니 하나님 끗발이겠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공무원이니 끗발 부려 자식들 좋은 곳 보냈으려니 지레짐작이다.

퇴직한 후 부동산 중개업을 차렸다. 몇 년 전 근무처라 스스럼없이 지적과에 찾아가 매물 번지를 소유자 이름석자만 갖고 토지대장을 추적한다. 추적한 도면을 복사하자고 대어드니 브레이크가 걸렸다. 후배 공무원의 눈치가 심상치 않다. 아무리 선배지만 정도가 심하지 않느냐는 말씀이다.

아차, 나는 공무원이 아니지. 업자이지. 처칠 수상의 차(車)를 단속하던 경찰관을 안다. 포로수용소에서 동료의 죽음을 대신 하던 순교자를 안다. 높은 직급으로도 줄서기의 순서를 기다리던 성인을 안다. 그리고 끗발로 나라가 망한다고 개탄하던 나다.

그 끗발 내가 부리는구나.

토지 대장과 지적도의 증지 값을 지불하고 나오는데 눈총 주는 사람 없건만 뒤통수가 왜 이리 따가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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