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기획]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처절하고 참혹했던 지평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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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기획]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처절하고 참혹했던 지평리 전투
  • 양병모 기자  jasm8@hanmail.net
  • 승인 2017.02.13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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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신문=양병모 기자 | 한국전쟁 판도가 바뀌는 3일간 전투, 10대 1 열세 연합군의 대승으로 끝나
중국 패배 인정하는 전투로 역사기록, 양평문화원 지평리 전투 재조명 연구

참전용사 처절한 전투 승리 지평리 사수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5일까지 3일간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제2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전투를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지평리 전투의 승리는 인천상륙작전과 중공군의 2차 공세에 이어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1950년 말 연이은 패배로 떨어졌던 유엔군의 사기가 다시 올랐고,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화력과 견고한 방어 진지로 물리친 최초의 전투가 됐다. 이후 자신감을 되찾은 유엔군과 한국군은 용문산을 탈환해 수도 서울 수복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중앙신문은 지평읍에서 벌어진 지평리 전투를 양평문화원, 지평리 전투 기념관, 양평 6.25참전동우회, 박동하 참전용사들의 협조를 받아 지평리 전투에 대해 짚어봤다. [편집자 주]

지평리를 사수하라, 지평리의 승전, 용문산 전투를 발행한 정재찬 양평문화원장이 한국전쟁 역사를 바꾼 지평리 전투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양병모 기자)

지평리 전투는?
지평리 전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지평리 일대에서 UN연합군인 미국 2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전쟁이다. 인천상륙전쟁으로 승승장구하던 UN연합군 1950년 10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참담한 후퇴를 거듭했다.

연합군은 거듭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져 일본으로 철군까지 계획했다. 하지만 미군과 프랑수 군 5600명은 지평리 일대에서 중공군 5만 명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중공군 4946명(국방부 집계)를 사살해 이들을 퇴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연합군은 지평리에서 대승을 거둬 군인들의 사기를 올리고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다.

치열했던 3일간의 전투
연합군 지평리 전투가 있기 전인 2월 1일 원주 쌍터널 부근을 수색하다 중공군과 마주쳐 적군 1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지평리에 중공군이 주둔해 4차 공세를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지평리 사수 작전이 시작됐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평리는 연합군에게 불리한 지형이었지만 막강한 화력과 공중지원으로 2월 13일 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포탄을 모두 소진할 정도로 첫날 전쟁은 치열했다.

중공군 2개 사단이 전방 2개 대대에 8차례에 걸친 파상 공격을 해왔지만, 미군은 이를 모두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프리먼 23 연대장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연합군은 다음날인 14일 첫날 소진된 탄약과 식량을 공중에서 보급해 공세를 계속 이어갔다. 중공군은 연합군의 공세로 낮에는 산에 숨어 대기하고 있었다. 해가 저문 저녁 7시 어둠을 틈타 중국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다. 중공군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해 연합군 진지 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미군 및 프랑스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해 중국군은 새벽녘에 다시 철수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연합군은 사령부에 철수를 요구했지만, 사령부는 사수를 명령하고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구조대를 편성했다. 여주에 주둔하고 있던 크롬베즈 구조대는 15일 아침 전차 23대와 병력 165명을 태우고 지평리로 향했다.

이들은 여주 옥천면과 양평 지평리 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으로 발이 묶이자 크롬베즈 중령은 병력 165명에게 사수를 명령하고 전차를 모두 지평리로 진격시켰다. 이곳을 사수하기 위해 남아 있던 병력 165명은 중공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지평리에서 전차부대와 합류한 연합군은 이날 오후 5시 45분 전차들의 호위를 받으면 중공군의 선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연합군의 화력과 자신들의 보급 문제로 결국 후퇴를 하면서 3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끝났다.

전투가 끝나고
이번 전투는 화력과 보급의 승리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단기간에 전투를 끝낼 것이라는 판단을 했지만,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은 보급물자를 후송하는 중공군을 포격했다. 

결국 중공군들은 밤을 이용해 우마차로 보급을 하면서 전투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지평리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중공군의 전투식량은 옥수수가루가 전부였고 무기라고는 수류탄 몇 개가 전부였다. 특히 취조 과정에서 포로들에게서 심한 술 냄새와 아편이 나와 술과 약물에 취해 전투를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주민들의 증언
주민들도 3일간의 전투가 엄청 치열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2월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군인들이 마을로 내려와 불을 쬐다 다시 참호로 이동해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또한 밤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아침이 되면 죽은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이를 치우는데도 하루가 걸릴 정도였다. 연합군 비행기가 적군 집결지에 네이팜(휘발유를 이용한 인명 살상용 포탄)을 쏟아부어 불에 탄 시체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밤마다 울리는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전투가 시작됐다는 알게 되고 잠시 후 총소리와 포탄 소리가 지평리 전역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지평리 전투의 의미
지평리 전투는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이다. 연합군은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3번의 공세에서 모두 패해 일본으로 철군하는 것까지 논의됐다. 하지만 연합군은 중공군이 최초로 전술적으로 첫 승리였으며, 중공군이 막강한 병력으로 공격해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전투였다. 지평리 전투를 기점으로 관악산, 양평, 원주, 대관령을 잇는 전선을 회복하고 한강을 도하해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전사 5000여 명과 79명이 포로로 잡히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연합군 또한 94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피해를 발생했다. 중국도 이례적으로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를 인정하면서 패배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장재찬 양평문화원장, 우리는 지평리 전투를 결코 잊지 않겠다
지평리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전세를 바꾸는 중요한 전투 중에 하나이다. 이날의 승리로 한국군은 용문산 전투에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는 가운데도 승리해 수도권 회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지평리 전투에서 연합군이 패했다면 우리나라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아 지금의 우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장 치열하고 중요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한국 전쟁 중 양측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전투로 치부되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전쟁에 참전한 국가는 웬만해서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지만 중국은 지평리 전투를 패배한 전투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패배에 입장에서 지평리 전투를 평가하고 연구를 하면서 책을 발간할 정도로 중국에게도 중요한 전투였다. 우리 문화원도 2008년 처음으로 당시 전투를 참전용사, 주민들의 증언, 국방부 자료를 모아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책을 발간하게 됐다.

당시 구전으로 전쟁 무용담이 전해져 오고 있었지만 정확한 사료도 없고 사람들은 이 전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래서 국방부를 통해 어렵게 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프랑스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몽클라르 중령은 1차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준위까지 진급했던 전쟁 영웅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참전하기 위해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인부대(프랑스 특수부대) 출신의 지원병 700명을 모집했다. 그는 자국 군법에 따라 장성이 사단 이하 지휘관으로 참전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하면서 참전해 지평리를 사수했다.

미군은 전황이 불리하자 철군할 것으로 논의했지만 몽클라르 중령만큼은 목숨 걸고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책을 발간하면서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을 목숨까지 던지면 지키려 했던 전쟁영웅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전투는 문화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 시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 양평의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문화원은 지평리 전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됐고 용문산 전투와 관련된 책을 발간하기 이르렀다. 또한 2015년에는 전쟁 영웅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평리 전투가 벌어졌던 자리에 기념관을 건립하게 됐다. 현재 영화사들이 이 전투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의뢰가 들어오고 있어 전쟁 영웅들의 무용담이 후세에게 감동으로 전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문화원은 지평리 전투뿐만 아니라 용문산 전투 등을 더 많이 연구해 전쟁영웅의 뜻을 기리겠다.

박동하(91) 참전용사, 지평리를 사수하라
20살이 되는 1948년 군대에 입대해 2년 후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내가 지평리 전투에 참전하게 된 것은 프랑스 군이 지원병 없이 외인부대 출신들이 자원해 참전했기 때문에 한국군이 전사자나 부상병을 보충하기 위해 차출되면서이다. 연합군과 한국군은 물 밀 듯이 내려오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평리와 강원도 횡성에 군병력을 집결시켰다.

미군들은 지평리 고지에 참호를 파고 공격을 준비했지만 내가 소속된 프랑스 군은 작전상 불리한 지금의 지평리역 평지에서 주둔했다. 전투는 2월 13일 시작됐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저녁이면 산꼭대기에서 나팔과 꽹과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 완전 어둠이 깔리면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때 우리의 지휘관 이였던 몽클라르 중령은 대원들에게 적이 10m 앞까지 다가오기 전에 절대 총을 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적들의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어둠에서도 적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가까운 거리가 되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총소리와 나팔, 꽹과리가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동이 트는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여기저기서 포탄이 터지고 총에 맞아 신음하는 병사들의 소리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첫날 전투가 끝나자 우리 눈앞에는 중공군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일부 병사는 죽은척하고 있다가 항복하기도 했다. 또한 수류탄이 참호 바로 뒤에서 폭발한 흔적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중공군들은 낮에는 산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밤이 되면 어김없이 나팔과 꽹과리 소리를 내면서 어김없이 공격했지만 우리는 수적을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선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 건 전투를 계속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15일 크롬베즈 구조대의 전차가 도착하면서 연합군의 파상공세가 이어졌고 어느 순간 총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중공군들이 후퇴하고 연합군의 승리를 알리는 고요함이었다. 16일 밤은 너무 조용했다. 치열했던 3일간의 전투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때부터 우리 군은 중공군이 이기기 시작하는 기폭제가 마련됐다.

당시 2월 중순이라고 해도 낮 기온이 영하 20도의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어 전투는 쉽지 않았다.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몽클라르 중령의 명령은 우리 사병들이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힘이 됐다. 지금도 매년 2월 13일 지평리 전투현장을 찾을 때면 전우들과 전쟁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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