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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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2.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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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자두를 사왔다.

피자두다. 심 선생이 피자두에 관한 시()를 써 왔다.

올해는 자두가 풍년이라 지인들과 나누어 먹는데 자두 값보다 택배비가 비싸더라. 그 택배비가 비싼 게 아니다. 원래 택배비는 정() 값이란다. 정 값, 정 값이란 말에 옛정이 되살아나 값의 고하를 잊고 마냥 즐거웠노라는 시(). 그 시의 피자두가 먹고 싶어 붉은 자두를 사왔다.

과연 피자두다. 껍질도 피같이 붉고 속까지 붉다. 두어 개 먹다 칼로 잘라보았다. 일제 회칼의 예리한 날로 과육을 단칼에 잘라 하얀 접시에 담았다.

(). 자두(紫桃)의 첫 글자 자색이다.

진한 핏빛 한 점, 하얀 사기 접시에 냉큼 올라앉은 정염이라니. 자수정보다 더 붉은 자색이라니.

먹는다는 건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호사를 누리며 냄새를 맡고 입으로 먹는다. 달고 싱싱한 알맞게 씹히는 과육의 맛, 그리고 시다. 껍질이 질기고 씹히면서 머리채를 흔들리며 진저리치게 하는 이 맛.

어려서 자두 맛을 보았다. -어려선 자두라고 하지 않고 오얏이라 했던가. 나의 성이 오얏 이(), 왜 성씨에 오얏이란 과일 이름을 썼을까. 어려서 어디서 언제 먹었는지 잊었다. 오얏나무를 본 기억도 없고 누군가가 한 개 주어서 먹었다. 더 먹고 싶었는데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잊었다. 가끔 시장에 나와도 비싼 과일이려니 하고 사 먹지도 못했다. 지나가며 구경만 했다.

꽤 세월이 흘렀다. 학교 교육을 마쳤고 군대를 다녀왔고 직장 생활도 끝났다. 부동산업을 하면서 시골 동네를 다녀보면 생각보다 빈 집이 왜 그리 많은지. 집은 텅텅 비어 있는데 마당가 오얏나무에 자두가 무더기로 열려 익고 있었다. 농익어 며칠 지나면 모두 버릴 것만 같았다. 원 없이 따 먹었다. 주인 없는 빈 집에서 혼자 따먹었다.

언젠가 부동산 매매를 하면서 매수자와 중개대상물을 답사하는데 두릅나무 밭을 지나치며 빼곡히 솟아 나온 두릅 순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두릅에 손을 못 대게 했다. 두릅나무 주인은 오로지 이 때를 기다려 일 년을 참아 왔다. 오직 두릅 순 한 번 따자고 일 년을 각고하며 기다린 것을 생각하면 어찌 두릅에 손을 댈 수 있겠느냐. 보기보다 훌륭한 부동산 매수자다.

자두를 따 먹으며 불현듯 그 사람이 생각나 따 먹기를 그만 두었다. 지금은 어딘지도 모른다. 한 해는 친구 집에 흐드러지게 열린 것을 몇 개 따 먹은 기억이 있다.

지금쯤 다시 그의 집 울타리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있을 것인데 일부러 찾아가고 싶지 않다. 차라리 슈퍼에서 한 상자 사 먹는 게 훨씬 좋을 것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보석상에 은밀하게 진열된 자수정을 만난다. 자수정을 처음 본 날 오금이 펴지지 않았다. 어찌 이리 처연하도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저 붉으면서도 푸른 검은 속살을 내보이는 자체만으로도 천기누설이 아닐지. 저릿저릿 하는 전류가 전신을 옭아매는 것만 같아 한참을 거기 서서 꼼짝 할 수도 없었다.

처음 석류를 쪼개 보여준 게 막내 고모였다. 그걸 보고 보석을 만난 듯 무척 화려해, 한참 도취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도 있는가. 지금도 석류를 보면 다이아몬드로 반짝이는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석류는 절대 먹을 수 없는 과일, 저 날카롭고도 모질게 딱딱한 금강석을 어찌 씹을 수 있을까.

석류를 반으로 쪼갤 수 있는 고모의 손이 신기했을 뿐 아니라 왜 그리 아름다웠는지. 그 반으로 쪼갠 보물을 선뜻 내주며 먹으라는데 겁난 나는 공포에 젖었다. 하나 고모의 눈빛은 어찌나 단호했던지.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서서히 입에 넣고 눈 지그시 감았다. 아아, 입속으로 들어가는 위태위태한 날카롭고 강철 같은 견고성이 가볍게 으깨지는 찬란한 다이아몬드의 소멸이라니.

그때의 모든 기억들, 그때의 모든 이미지들을 몽땅 그러모은다 해도 지금 하얀 사기접시에 오른 자두 한쪽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검붉은 한 방울 핏빛보다도 더 잔인하도록 진한 이 한 알의 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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