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택 칼럼]명성황후를 명성태(太)황후로 바로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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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택 칼럼]명성황후를 명성태(太)황후로 바로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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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3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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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택(언론인)

| 중앙신문=중앙신문 | 조선조 제26대 고종은 선대정부들이 갈망(渴望)하고 열망(熱望)해온 황제의 나라로 1897년 8월16일 대한제국을 전 세계에 선포하고 황제의 나라가 됐다.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위해 조선국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국왕의 칭호를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로 명명하였다.

이어 윗대 대왕 3분과 추존왕 4분까지 7분을 제황의 묘호를 내려 황제의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이어 왕비 민씨를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 묘호를 내려 명성태황후로 시호(諡號)가 내려젓지만 일인은 민비로 격하 부르게 하여 생가 주변주민들은 황후가 누구냐고 물었다.

명성태황후는 아버지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무남독녀로 1851년 11월 17일 여주시 능현동에서 출생하여 9세가 되던 해 6대조 민유중(숙종비 인현황후 생부)의 생가 감고당에서 살다가 16세에 고종태황제의 비가 되시어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고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가 1895년 10월 8일 새벽 건청궁 곧녕함에서 미우라공사가 보낸 자객들에게 무참하게 시해 당하시니 춘추 45세였다.

명성태황후는 고종태황제로부터 태황후 시호까지 받았지만 일인들은 민비로만 부르게 하고 조선총독부 등 이름난 서적들 에게까지 민비로 기록토록 했다.

또한 이곳 생가에는 명성태황후가 8세까지 성장한 생가에 순종효황제 친필 탄강구리비(誕降舊里碑)가 세워져있어 어머니를 애련히 그리는 비문이어서 생가를 유난히 돋보이고 비명에 가신 그분의 업적과 활동상을 다시 한 번 상기 할 수 있어 명성태황후를 절로 추모하게 된다.

여주시는 지난 95년도부터 13년에 걸쳐 시·도비 250억 원을 들여 안채만 있던 생가를 명성태황후의 뜻을 기리고자 성역화사업 조성으로 생가보수와 사랑채 별당채를 건립해 생가의 위상을 높이고 이외 기념관 문예관 연못 등을 조성 볼거리 위주로 성역화 사업을 조성했다.

특히 생가에는 영조대왕의 친필휘호가 내려진 320여 년 전 건축한 건물 감고당(感古堂)을 이전 복원해 놓아 고전미가 넘치는 한옥건물이 생가를 돋보고 생가의 운치를 더욱 아름답게 고전미로 우아하게 보여줘 생가를 방문한 관람인 모두에게 보람과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감고당은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에게 밀려나 생가에 머물러있던 부원군 민유중의 생가를 숙종대왕이 새로 건축해준 것을 영조대왕이 왕자시절 인현황후의 따듯한 보살핌을 받아온 생가를 방문 감고당 휘호를 내린 건물에 태황후가 간택 전까지 머물러 있던 가옥이다.

이외 여주는 명성태황후 생가를 비롯하여 수도권에서 가장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한 고장으로 국보4호 고달사지 부도, 유일하게 남한강변에 세워진 천년의 고찰 신륵사, 세종 ‧ 효종대왕 영·영릉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여 유서 깊은 명소의 고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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