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㊲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 ‘짠물의 원조’ 주안

2023-11-01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동인천에서 답동까지 이르는 인천 최고의 상권이 1970년대 들어서면서 주안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 근대화·공업화의 물결에 따라 주안역 뒤로 들어선 5공단이 활기를 띄며 경제 성장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로 인해 주안역을 중심으로 대형 업소들이 들어서며 주안이 인천 최고의 상권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인천을 대표하는 땅 이름 가운데 하나인 주안(朱安)은 주안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요즘에는 없어져 쓰이지 않는 이름인 주안산은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지금의 간석동 만월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글자 그대로 흙이 붉고 산의 모양이 기러기와 같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타당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에 주안산이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는 결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이다. 이 때문에 일부 국어학자들은 주안이라는 이름이 무척 많음을 지적하며 이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주안은 원래 지금의 남동구 간석·구월·십정동 일대를 가리켰던 말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경인철도가 한창 공사 중이던 1898년 당시의 간석리에는 말을 관리하던 주안역이 있었다.

그러나 철도가 생기니 이 역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됐고, 그 대신 당시 충훈이라 불리던 지금의 주안동에 새 철도 역사가 생겨 주안역이라는 이름을 이어받게 됐다. 충훈이란 조선시대 바닷가였던 이곳에 정부 기구인 충훈부의 방죽이 놓여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처럼 충훈리에 주안역이 생긴데 이어 1907년 이후 이곳이 들어선 염전까지도 주안 염전이라 불리면서 결국은 충훈리 일대가 간석동 일대였던 원래 주안의 이름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이는 지금의 제물포나 영종도가 원래 다른 곳에 있던 이름을 빼앗아와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은 주안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이 들어선데 이어 그 뒤로도 많은 양의 소금을 생산해 내 인천이 ‘짠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공헌했다.

실제 인천이 ‘짠물’이 된 것은 전국에서 인천 앞바다의 염분이 제일 높아 그리 불려진 것이다.

1950년대

이를 두고 타 지역 사람들이 인천 사람들을 폄하하기 위해 돈을 안 쓰는 놈(짠 놈)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바로 알려야 한다. 이로 인해 인천 토박이들은 괜히 ‘짠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타 도시에 나가면 따돌림을 받기 일쑤였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천 토박이를 ‘짠 놈’으로 만든 이 염전들은 인천에 큰 효자노릇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모든 교역의 필수인 소금이 대량으로 생산되며 인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하지만 이 염전들은 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그 대신 공단이 들어서며 인천경제를 이끌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