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⑳ 북성동 어시장

2023-05-24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월미도가 있는 북성동(北城洞)은 조선 초·중기 이곳에 있던 성곽 ‘북성’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북성동에는 월미도를 비롯해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인천 최초의 현대식 건물들이 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인천 부두와 어시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인천에 상설 형태의 어시장이 들어선 시기 역시 인천 개항 이후다. 개항 후 1880년대 말 무렵부터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늘면서 수산물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생선을 위주로 하는 일본인들의 음식문화에 따라 생선 소비량이 급증한 것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은 1887년 30여 척의 동력어선을 투입해 인천 앞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생선을 잡았다. 하지만 수산물 유통 구조는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0년 서울에서 내려온 정흥택씨 형제가 어물객주(수산시장)를 개설하면서 전문 어시장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들 형제들은 내리(중구 내동)에 상점을 차려놓고 근해 어업자들에게 물량을 공급받아 독점으로 판매한데 이어 1902년 신정(신포동)에 상설 어시장을 개설했다. 한옥 형태로 지은 이 어시장에선 주로 행상인들에게 생선을 도매로 넘겼는데 직접 가서 좋아하는 생선을 골라 사가는 일인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게를 메고 다니는 행상인들로부터 생선을 통째로 사는 게 통례였지만 일인들은 대개 어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횟감을 떠서 가거나 토막을 쳐서 사갔다고 한다.

사진은

정씨 형제의 어시장이 날로 번창하자 일인들도 경쟁적으로 어시장 운영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1907년 인천항 확장을 위해 해안 매립공사가 벌어지면서 어시장이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자 해안과 가까운 중구 북성동으로 옮겨 인천수산주식회사로 통합됐다.

해방직전 인천수산주식회사는 경기도어업조합연합회로 이름을 바꾼 뒤 1961년까지 공판장과 어시장을 관리해 왔다.

60년대 들어 어시장은 큰 호황을 맞는다. 연평도 파시에 따른 4월부터 초여름까지 어선마다 조기를 가득히 싣고 귀항했다. 욕심 많은 선주들은 배 중량이 넘치도록 조기를 싣고 들어오다가 배가 기울면 조기를 담은 가마니를 수십 개씩 바다에 버리고 귀항을 했다고 한다. 이 당시 인천에는 집집마다 조기를 사다가 말리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로 조기가 흔했다.

북성동 어시장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선어부에만 150여 개 점포가 있었다. 이와 함께 건어부 75개, 젓갈부 50여 개, 패류 등 기타 점포들이 300여 개에 달했다. 점포를 갖지 못한 서민들은 생계수단으로 광주리에 생선을 담아 머리에 이고 부평은 물론 부천에 이어 서울지역까지 다니며 생선을 팔았다.

당시 필자의 친구인 김 모 씨 모친께서도 광주리에 생선을 이고 다니며 판매를 하다가 1975년 북성동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이전하며 소원이던 점포를 마련했다. 특히, 연안부두 어시장 개설에 공로를 인정받아 시장 입구 한가운데 첫 번째 점포를 추첨 없이 얻어 넷째라는 간판을 걸고 현재까지 장사를 해오고 있다.

인천종합어시장.

현재의 인천어시장은 인천시가 1975년 연안부두 일대 180만여 평을 매립, 도시정비 사업을 벌이면서 비롯됐다. 어시장 부지는 북성동 어시장과 화수부두에서 장사를 하던 499개 점포주들이 경기은행(현 시티은행)에 적금을 들고 대출을 받아 공동으로 매입했다. (주)인천개발공사는 그해 어시장 개설 허가를 받아 북성동 어시장을 옮겨 관리해 오다 1981년 (주)인천종합어시장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종합어시장 측에 따르면 한창 경기가 좋을 때는 어시장에서 연간 1천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지만 갈수록 어획량이 줄면서 매출액이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