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⑪ 송학동

2023-03-22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지금은 사라진 지명이지만 송학동(松鶴洞)은 인천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한때 인천에서 최고의 부를 상징하며 명성을 떨치던 곳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또 한편으로는 답동의 인하공사(현 국정원 인천분실))와 함께 송학사(육군 방첩대)가 인천을 대표하는 정보기관의 산실로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자유공원에서 홍예문의 남쪽 언덕 지역으로 인천항 개항 당시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있었다. 자유공원 일대에 만국지계 또는 각국지계라 불리던 서양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생기자 그 안에 편입됐다. 이때까지도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다가1912년 일제가 자기들 방식으로 산수정(山手町)으로 부르다 광복 뒤인1946년에 송학동이 됐다. 송학동은 이곳 언덕이 소나무가 울창하고 운치가 있는 곳이라 붙인 이름인데 많은 것이 바뀌어 버린 지금으로서는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길을 지나가면서 쳐다만 보아도 등골이 오싹하던 옛 인천경찰서, 그리고 송학사(현 기무사),인성 여자중고등학교 등이 위치해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최고의 관람석을 자랑하던 시민회관, 인천 최초의 카바레, 사교모임의 장소로 널리 알려진 옛 제물포구락부회관 등이 송학동의 명성을 대신했다. 이와 함께1892년 미국 상인 타운센드가 옛 인천경찰서 자리 아래에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최신식 정미소를 만들어 운영해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다. 원래 광산기사이던 그는 이에 앞서1885타운센드 상회를 세우고 화약과 석유를 수입하거나 은행대리점을 운영하며 토목사업 등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이 밖에도 석탄이나 소가죽 수입 등 돈벌이가 되는 것이면 모두 손을 대 당시 세창양행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큰 회사를 일궈냈다. 이렇게 벌은 돈으로 정미소를 세운 것인데, 이곳에서는 쌀을 찧던 기존의 우리 방식과는 달리 증기 동력이 딸린 고급 기계를 이용해 훨씬 곱고 깨끗한 입쌀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타운센드라는 발음이 익숙하지 않았을 당시 인천사람들은 그를 담손이라고 부르며 방앗간 또한 담손이 방앗간이라고 하며 많이 찾았다고 한다. 특히1960년대 초 시민회관에서 개봉하며 당시 최고의 관람객을 기록한 장동희 주연의 ‘5인의 해병’, 신성일 주연의 빨간 마후라등은 연일 만원사례를 이루며 인천사람들을 송학동으로 끌어들이는 데 한 몫 했다.

초등학교5학년이던 필자도 영화를 관람하고 싶은 욕심에 친구들과 함께 시민회관 밖 후문 쪽3m높이의 언덕에서 뛰어내려 화장실 창문을 넘어 훔쳐 들어가곤 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든가, 한번은 기도(문지기)한테 잡혀 몽둥이찜질에 이어 화장실 청소라는 임무를 마치고 나면 이를 불쌍히 여긴 기도가 영화를 관람케 해주었다.

시민회관.

그 후 기도를 삼춘이라고 부르며 화장실 청소에 이어 잔 심부름 등을 해주는 보답으로 우리에게는 공짜 관람이라는 특권이 생겼다. 한 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영화관은 화장실이 깨끗해져서 좋고 우리는 영화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공짜로 구경해서 좋은 것이다. 또 송학동 17번지에는 시 지정 유형문화제로 중구문화원이 들어서 있는 옛 제물포구락부회관 건물이 있었다.

구락부란 함께 즐기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요즘의 동호인 모임 정도가 될 텐데, 영어의 클럽(club)을 일본인들이 그와 비슷한 발음으로 표현한 음역 단어다. 한 때 큰 인기를 끌었던TV드라마피아노의 촬영지로도 쓰였던 이 건물은1901년에 지어져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의 사교장 용도로 사용됐다. 당구장과 사교장, 테니스장 등을 두루 갖추고 있던 이곳에서는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모여 늘 웃고 즐기며 흥청거렸다고 하니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조선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한편 송학동 제일교회 밑 산기슭에는 청나라 외교관 출신 오례당이 살았는데1909년에 지은 독일식의 이집은 존스톤 별장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의 이름에 자가 있어 오례당이 그대로 집 이름으로 통했고, 사람들은 이를 흔히 오리당이라 부르곤 했다. 이 건물은 광복 뒤에 육군 방첩대(송학사)가 사용하다가 19684월 불이 나서 모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자주 다니던 우리는 이곳이 무시무시한 송학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은 으쓱한 이곳이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것을 이용해 담배를 피웠다. 그러면 여지없이 사복 군인이 나타나 학생들을 혼내 준데 이어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어디 학교 몇 학년 누구냐며 겁을 잔뜩 준 뒤 영락없이 누나가 있느냐, 미인이냐, 누나와 함께 놀러 오면 맛있는 것을 사준다는 등 유혹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학생들은 겁을 잔뜩 먹은 채 서로 자기 누나가 예쁘다, 한번만 봐주면 누나를 꼭 데려 오겠다는 식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곤 했다. 물론 군인 아저씨들도 뻥인 줄 알면서도 장난삼아 그런 것 같다.

지금은 송학사가 부평으로 이전해 자유공원 돌담길에는 아득한 추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