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있음에

2020-05-14     이상국
이상국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 다림질해 주고, 청소해 주고.

모두 아내인 당신의 몫인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가장이며 당신의 대리인이며 보호자이며 주인인 줄로 알았다. 아내는 나의 보조인. 나의 그림자. 나의 존재 뒤의 기피인.

모든 재산-부동산의 명의인은 나이며, 부조금 봉투의 발신인은 나의 이름. 봉급 봉투의 주인은 나. 문패마저 나의 이름. 당신은 어느 곳인가 숨어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아야 미덕인 줄 알았다. 언제 어디서나 바람인듯, 흔들리는 연약한 불꽃인 듯, 비 오는 날의 떠다니는안개, 아주 낮은 곳에서 은거하는 은밀한 숨소리.

그런데 퇴직을 하고 얼마 지난 뒤, 돌아보니 내가 있어 당신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당신이 있어 내가 있었던걸 알았네.

당신의 밥, 당신의 빨래, 당신의 다림질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네.

당신의 슬픔, 당신의 아픔, 당신의 울음, 당신의 기쁨, 당신의 웃음, 당신의 노고가 어우러져야 비로소 나의 실존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았네. 해질 무렵 겨우 알았네.

아내여! 그대 있음에 나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