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막걸리

2018-09-16     중앙신문

누룩과 고두밥은 자신이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웃음을 주고 회한을 잠재우는 묘약이 될 줄 상상도 못 한 채 막걸리로 태어난다. 태어나기 바쁘게 청춘을 노래하게 하며 늙은이의 설움을 달래고 고단한 이의 힘겨움을 털어준다.

막걸리의 신맛, 쓴맛, 떫은맛은 달콤한 맛에 묻혀버려 영원한 향기로 우리의 코와 입맛을 자극하면서 땀 흘려 일한 농부의 갈증을 덜어주고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의 힘을 돋우어 준다.

막걸리가 어른들의 몫이라면 아이들에게는 술지게미가 있다. 안방 아랫목에서 며칠 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때를 기다리던 술독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어 술로 빚어질 때 술지게미는 아이들 차지가 된다. 설탕을 흩뿌려 큰 그릇에 담아내면 아이들은 맛있게 먹었다. 어느 때는 술이 덜 짜진 지게미를 먹은 꼬마가 비틀거려서 배꼽이 빠지게 웃었는데 그 녀석이 벌써 서른 살이 넘은 청년이 되었다. 가끔 어머니는 막걸리 반죽으로 빵을 만들어 주셨는데 막걸리 이용방법의 하나였다.

식량이 모자란다고 시골농부들의 큰 기쁨이자 즐거움인 기호식품을 근절시키던 시절, 어느 해인가 우리 어머니도 밀주단속에 걸려 맹물을 떠놓고 명절제사를 올린 적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교주(校酒)가 되다시피 한 막걸리를 마셨는데 나는 원래 술이 약하고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피했지만, 신입생환영회, 졸업생환송회, 학교축제, 동아리모임에서 냉면그릇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원샷으로 마시게 강제하면 억지로 마시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생각이 난다. 학교 앞 식당, 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은근한 취흥에 목소리를 높이며 가난한 대학생활의 한 토막을 장식하던 추억, 그 시절 그 학교를 다닌 남녀 학생들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기억이다.

소주가 보편화 하면서 나도 대개 소주를 마셨는데 시골에 내려온 후, 부동산사무소를 개업하면서 나도 모르게 막걸리 애호가가 되어 버렸다. 시장할 때 한잔 마시면 슬며시 다가오는 포만감, 은근히 취할 때 그 기분이 좋아 매일 마셔댔는데 술이 제법 늘어 막걸리 한 되는 쉽게 비우는 실력이 되었다.

마침 양조장이 이웃에 있고 값이 싼데다 독주와 달리 별스런 안주 없이도 마시기 편해 오후가 되면 매일 몇 병씩 해 치웠다. 막걸리를 마시면 장(腸)운동이 활발해져변비가 없어진다고 예찬하며 진정한 벗으로 대접하면서 가까이 한다.

가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채 귀가 길에 올랐다. 깜빡 졸면서 남의 차 두 대를 들이받고 내 차도 조수석 쪽이 크게 파손되는 사고를 일으켰으니... 술 마실 때는 좋았는데, 범법자가 되어 경찰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면허증을 뺏긴 채 홍당무가 되어 집에 오니 자괴감에 정신이 하나도 없고, 장난으로 한 얘기인 줄 알았던 아내는 깜짝 놀라 여러 날을 두고 훈계로 밤을 샌다.

보험회사 직원이 오더니 음주사고는 자손보험에 들었어도 내 차는 고쳐주지도 않고, 상대방 차도 먼저 할증금 50만원을 더 내야 고쳐 준다기에 꼼짝 못하고 내주고, 내 차 견적을 받으니 아예 폐차를 하는 게 낫다 싶어 아직도 몇 년은 더 탈수 있는데 폐차를 해 버렸다. 110일 면허정지에, 세 번에 걸쳐 소양교육을 받아야 하는 법에 따라 서울을 오가며 늦은, 법 공부를 하고 그 중 한번은 현장교육을 받아야 했다. 말이 좋아 교육이지, 초등학교 앞에서 피켓 들고, 어깨띠 두르고 몇 시간 계몽활동을 하는 것인데 아는 사람 만날까 두려워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으니 망측하다.

즐겨 마시던 막걸리에 벌금, 차량구입비, 등록세, 취득세, 보험료 등등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이고 갑자기 지출된 돈 생각하면 배가 아파 못 견딜 지경이다.

1년 이내에 같은 사고를 내면 면허취소라니 그것도 겁나는 일이고 가족들이 모두 알게 되어 창피한 일이다.

막걸리 마시고 면허정지 된 처지에 음주운전 하지 말라고 전도를 하니 듣는 사람들이 웃는다. 이제는 막걸리 양도 반으로 줄이고 술기운이 있으면 운전을 하지 않으려고 작심을 하니 소득이라면 또 웃을까.

몇 평생 마시고도 남을 술값을 한방에 날리고 차린 정신, 그래도 막걸리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