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흙이 슬프다

2018-09-13     중앙신문

아파트 10층에서 부엌 창문으로 내다보는 경치가 참 좋다. 푸른 산과 들, 예쁘게 지어진 집들, 어느 외국의 시골마을보다 아름답다. 사철 변하는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창문 밖에 펼쳐진 경치 중에 밭이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곳에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많은 직물들이 심겨져 있다. 땅 주인이 부지런한지 아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주인의 손이 많이 간 밭은 기름이 흐른다. 밭을 내다 볼 때마다 심어 놓은 작물들이 잘 자라서 주인이 자급자족을 하는데 충분한 양의 농사물이 되겠구나 하면서 혼자 흡족해한다.

봄이 되면 흙들이 땅 향기를 뿜으며 기지개를 활짝 펼 수 있다고 좋아할 새도 없이 모든 밭의 흙은 검은 비닐이 덮인다. 흙이 숨쉬기가 어려워 슬퍼할 것 같다.

창문에서 내다본 바다같이 넓은 밭에 제일 많이 심는 것이 고구마다. 고구마가 자라는 밭을 지날 때마다 풀 한 포기 없이 잘 가꾸어진 것을 보고 감탄을 하지만 뒤끝은 씁쓸하다. 고구마를 심기 전에 제초제를 뿌려서 풀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때문이다. 제초제를 먹고 자라는 고구마는 사람에게 해가 없을까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그중 넓은 밭에 해마다 수십 명의 여자들이 모여 고구마 심는 작업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금년에는 어찌된 일인지 아무것도 심지 않고 빈 밭으로 여름을 났다. 사람의 손이 가지 않는 밭은 장마를 지내면서 풀은 호랑이가 새끼를 칠만큼 무성히 자라 지나려면 겁이 날 지경이었다. 장마가 끝난 어느 날, 수십 명의 여자들이 밭에 무언가를 심고 있다.

드디어 밭이 제 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반가웠다. 넓은 밭에 검은 비닐이 씌워지고 작물이 심어졌다. 싹일 때는 잘 몰랐는데 어느 정도 자란 후에 가보니 잎이 꼭 당근처럼 생긴 것이 자라고 있었다. 그곳에 많은 돈을 들여 당근을 심었을 리는 없고 당근 잎이 천궁처럼 생겼다니 약초를 심었을 것이라 짐작을 했다. 밭을 갈고 골을 만드느라 여러 장비를 동원하고 많은 인력이 투입되어 심은 작물이니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잘 자라 달라고 마음을 보낸다.

태풍이 몇 번을 지나가고 밭에 깔았던 검은 비닐이 하나도 남김없이 바람에 날아가 벌거숭이 밭이 되었다. 걱정이 되어 밭에 나가보니 심어놓은 작물을 그동안 제법 크게 잘 자라고 있었다. 풀이 나지 말라고 덮어 놓은 비닐이 다 날아갔으니 나오는 풀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내 일은 아니지만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 창밖을 내다보니 십여 명의 남자들이 밭에 흩어져 등에는 농약이 담긴 통을 메고 일을 하고 있다. 그 넓은 밭에 풀을 맬 수가 없으니 제초제를 뿌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 순간 저 밭의 흙들은 참 슬퍼할 것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초제를 뿌리면 풀이 나지 않아 사람의 일손을 덜어 주겠지만 흙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많은 생명들이 죽어 갈 것이다. 사람이 풀을 뽑으면 닷새가 걸리는 일을 제초제 한 시간 뿌리는 노력으로 해결된다니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제초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발달할수록 자연에는 이익보다 손이 더 많다는 사실이 두렵다.

요즘은 유기농법으로 좋은 농작물을 재배해서 큰 수익을 얻는 농민도 많다. 이웃의 사과 과수원을 하는 분은 사과 한 알에 십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사과를 만들어 팔겠다는 꿈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 작물을 선호하기 때문에 유기농을 위해 고심을 하는 농민들이 많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반면에 농약에 대해 아무 개념이 없이 어떻게 사람에게 해가 되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농사를 잘 지어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심지어 가족들 먹는 것 따로, 시장에 내다 팔 것 따로 농사를 짓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제초제를 뿌린 밭에서 자라는 작물이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생명을 품을 수 있도록 흙이 슬퍼하지 않을 친환경적인 농약이 나올 날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