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이야기]나무가 스승이다

2018-09-05     중앙신문

참 멋있다. 아름답다. 사람들의 눈을 확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균형이 딱 잡히고 보기 좋은 대상에는 황금비율(golden?ratio,?黃金比率)이라는 것이 있다.

편안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TV의 화면을 황금비율로도 표현한다. 아름답기가 최고라고 하는 비너스의 늘씬한 모습도 황금비율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디 그뿐이랴 유명예술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 황금비율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금비율이 예술가의 영역만은 아니다. 산천초목에도 황금비율은 적용된다. 어찌 보면 이 비율을 자연에서 사람들이 배워낸 것 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천연기념물중 가장 아름다운 황금비율을 자랑하는 나무가 있다. 그 주인공은 보은의 정이품소나무다. 소나무의 자라난 모습과 가지의 배열이 남다르게 아름답다. 자기스스로 뻗은 가지이지만 예술가의 경지를 능가한다. 좌우대칭과 균형 잡힌 몸매를 자랑한다. 나이가 들면서 모진풍파에 많이 상한 모습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사람의 주변에는 신기할 정도로 정교한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식물들이 널려있다.

요즘 한참 익어가는 해바라기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부를 상징하는 황금색의 해바라기를 살펴보자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한 장의 사진이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빈 공간 하나 없이 촘촘하게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열매를 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어떻게 설계하고 배열하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정점에서 주변까지 그 어는 곳을 차별하지 않고 이렇게 열매를 고루고루 성숙시킬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일까?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갈등이 폭발하고 있는 시대에 저마다의 몫을 나누는 기술은 우리가 배워야할 모습이다.

인류에 큰 업적을 남기고 살아간 대 수학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수열로 설명하고 있다. ‘피보나치수열’ 이라 불리는 이 수열은 수학 과학 예술 등 많은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이 이론이 경제와 소득의 배분에 적용된다면 인간이 꿈꾸는 ‘모두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이 실현될 수 있을까하는 뚱딴지같은 생각이 든다.

식물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가싶다. 그러나 세상에 홀로를 고집하는 것은 발전이 없다. 어울려 살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도와가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식물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 불편할 이유는 없다.

언제보아도 경이로운 것은 식물이 살아가면서 나타내는 모습이다. 두뇌를 가지고 있는 인간보다 정교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 시간 언급한 해바라기만이 아니다. 가을을 알리는 들국화(사실 ‘들국화’라는 이름의 꽃은 없다.) 들국화 류가 맞다.

구절초나 쑥부쟁이를 관찰해보면 이들의 열매 맺음 또한 정교하다. 여름철에 즐겨먹는 옥수수도 예외는 아니다. 한 알의 빈 톨도 없이 일정한 크기의 옥수수 알이 촘촘하게 배열된 모습을 보면 신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식물들에게 누가 이 배열을 가르쳤을까? 이들이 정해진 공간에 질서정연하게 자리하게 하는 모습은 다름 아닌 예술이다. 이들의 스승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저 하늘의 태양인가?

들판의 곡식이 익어가고 가을이 성큼성큼 달려온다. 계절을 알리는 것도 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슈퍼컴퓨터를 운용하는 기상청보다도 정확도가 높다.

땀 흘리며 고생한 기상학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필자의 생각이 그렇다. 식물은 절묘하게도 꽃피는 시기를, 잎 만드는 때를, 열매다는 시간을, 어떻게 꿰차고 있을까? 가을이 되면 열매를 내려놓을 준비를 한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알밤은 가시빗장을 열어젖히고 토실토실한 열매를 내려놓는다. 도토리는 멋진 모자를 벗어던지고 땅으로 낙하한다. 그들은 예술가요 수학자요 기상관측가다. 눈을 즐겁게 하는 꽃을 피워내고 그윽한 향기를 나누어준다. 열매가 익으면 자신의 몸을 나누어주는 인간의 부모 같은 존재다.

현대문명 속에서 끝을 모르고 타락하는 인간성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자연 속에서 나무속에서 변하지 않는 희생정신과 사랑을 배워야한다. 산소를 뿜어내주고 열매를 주고 수명이 다하면 이웃의 거름이 되어주는 나는 그런 나무를 경외하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