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되돌린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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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되돌린다 해도
  • 중앙신문
  • 승인 2018.07.2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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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수필가,칼럼위원)

아침밥을 지으려고 쌀 항아리를 여니 텅 비어 있다. 며칠 전 농협에서 조합원들에게 나누어 준 쌀이 한 포대 있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밥을 안치려고 포대를 뜯으니 현미가 가득 들어 있다. 벌이 잠을 깨기 전 새벽, 양봉장에 일하러 나가야되는데 난감한 일이다. 쌀이 떨어져 밥을 짓지 못한 것은 평생 처음 겪는 일이다. 빈 쌀 항아리를 들여다본다. 살아온 날들이 항아리 속에서 어른댄다.

어렸을 적, 시오리나 되는 학교 길을 걸어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찌는 듯 더운 날도, 혹한의 추위를 겪으면서도 다녔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기도 하고 태풍 속을 뛰기도 하고…. 긴 인생길을 걸으면서 겪는 것들과 똑같은 날들을 길 위에서 마주했다. 길가에 풀과 들꽃을 보고, 논과 밭에서 자라는 농작물을 보면서 여러 가지 꿈을 키웠다. 그때 문학의 씨가 싹텄나 보다. 하지만 그 꿈들을 접어둔 채, 직장인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50여 년간을 남편과 아이들과 풍족하지는 않아도 등 따습게 살아 왔다.

긴 세월 어찌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었을까. 한때 남편이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다행히 오진으로 판명되었지만 그 때의 충격으로 요리를 배웠다. 한창 건축 붐이 일어 나라가 잘 살게 되고, 새 집을 지어 집들이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유행이었을 때다. 불안한 심정에 호구지책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 후, 사남매 키우느라 전업주부가 되었다. 이제는 아이들도 모두 짝을 찾아 저희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각자 앞가림은 하고 있다. 아이들 때문에 속 끓일 일이 없는 것도 큰 복이라 생각한다. 공무원으로 십여 년간 근무하면서 사회경험도 쌓았고, 남편 따라 외국에도 몇 년간 나가서 살았으며, 공부하러 간 아이들 도와주러 미국에 가서 얼마 동안 지낸 적도 있다. 여행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은 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사느라 그동안 묻어 두었던 문학의 꿈은 저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잊고 있었다.

손자들 어린이집에 데리고 다니느라 늦은 나이에 운전을 배운 것도 뿌듯한 기억으로 더해졌다. 아이들과 손자들 뒷바라지도 얼추 끝나 모두 품을 떠나고 나서, 허무하다는 생각이 밀려와 사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만난 수필공부는 나에게 엄청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활기차고 보람 있는 제2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긴 세월 살림과 남편 뒷바라지, 아이들 키우는 일밖에 할 줄 모르던 전업주부가 글을 쓰게 되었다.

물주고, 온도 조절해 주며, 거름 주고 하면서 간신히 싹틔운 어린나무를 기르기란 자식 기르는 것만큼이나 공이 들고 힘든 일이다. 어리디 어린싹이 괜찮게 자라 성목(成木)이 되었다 싶어도 자꾸 들여다보며 가꾸어야 한다. 보통사람들은 평생 한 권의 책을 내기도 어렵다는데, 그동안 세 권의 책도 냈고, 그 덕으로 상도 탔으며, 지방신문에 7년여 동안 칼럼 연재도 했다.

삶의 여정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 가끔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 사는 것도 큰 행운이다. 우리 부부가 살아오면서 큰 수술을 몇 번씩 했지만 의술의 덕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그 어떤 일보다 하느님을 만나고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큰 축복이다.

나이 들어 은퇴를 하면 시골에 살고 싶은 것이 꿈이었다. 대나무가 가득한 숲 속 작은 오두막에 개 두 마리 거느리고 남편의 취미인 벌치며, 연 키우고 비단이엉도 기르면서, 작은 화단과 잔디밭도 가꾸고 있다. 샌디위치패널의 조립식 집이긴 해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여름집이 있고,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는 아파트도 있으니 이만하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양봉장 옆 골짜기에는 사철 물이 흐르니 연못에 물을 댈 수 있어 벌에게 깨끗한 물도 먹이고, 밭에 물도 줄 수 있는 충분한 양이 되니 늘 풍요롭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여러 종류의 생명도 깃들고 있어 손자들의 좋은 놀이터다.

과일나무도 열심히 심었지만 벌 때문에 농약을 치지 못하니 열매가 열리기도 전에 벌레가 다 먹어 치워 멋대로 자라도록 버려두었다. 몇 그루 있는 대추와 밤나무도 사람이 먹는 것보다 벌레가 먹는 것이 더 많다. 매실 몇 그루와 양보리수, 앵두는 농약을 치지 않아도 식구들 먹을 만큼 효자노릇을 한다. 유기농 채소를 심어 아이들에게 먹이는 재미도 좋다. 과일과 채소는 나도 먹고 벌레도 같이 먹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해도 딱히 어떻게 살고 싶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미친 듯 치열하게 살아 보지도 않았고,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도 크게 없었다. 그림 그리기와 노래하는 재주를 타고 난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재주 없음에 한탄을 하지만 그게 헛된 욕심일 뿐이다.

그래도 살면서 꼭 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했던 몇 가지는 있다.

남편과 연애할 때 결혼하면 둘이서 무인도에 가서 살아보고 싶었던 꿈, 젊었을 때 남편과 둘이서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보고 싶었던 꿈, 은퇴 후 캠핑카를 장만해서 구경하고 싶은 곳에 며칠씩 머물면서 유유자적 여행하고 싶었던 꿈. 이제는 후세에나 생각해 볼 다 틀린 일이다.

옆에 있는 남편 생각이 문득 궁금해서 “다시 삶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다른 생에서도 여태 살아온 것처럼 살고 싶지 다른 삶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나 또한 지금의 남편과 아이들 다시 만나 이렇게 별 고생하지 않고 똑 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평범한 삶 속에서 이런저런 행복과 고통을 겪으면서 잘 헤치고 무난히 살아 왔으니 한 번 더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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