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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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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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1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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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신문=중앙신문 |  

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깜깜한 밤, 달 밝은 밤, 그믐달 밤이라도 좋다. 시도 때도 없이 동네 개가 까무러칠 듯

짖는 밤이며 어김없이 대문 박차고 들어와 안방, 건넛방, 사랑방, 방이란 방문이 한꺼번

에 열리며 성냥불 파랗게 그어대고 검은 눈동자가 방안을 이 잡듯 뒤진다. 사시나무 떨

듯 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우는 동생 걷어차는 왜놈의 구둣발.

아버지는 세계 2차 대전으 로 혈안이 된일제치하 면사 무 소 직원의 군량 미(軍糧

米) 공출 독려에 반발해 징용 제 1번 타지로 찍혔다. 오늘, 개인 할당량을 강요하는

자리에 또다시 면서기와 대면한다. 당신은얼마를 낼 건지. 내 식구 먹을 양식도 없는

데, 왜놈 전쟁에 꼭 공 출 을 내야 하 는지.

조선의 피가 흐르는 당신의 입장은 어떠신지. 이미 괘씸죄로 남양 군도 파병 제 1진

으 로 떠날 몸이다. 내 인생 끝난 판에 이놈 작살을 내. 목침으로 면상을 깨고 월악

산 독립투사로 변신하셨다.

언제나 아버지는 잠결에 만난다. 한밤중, 할머니와 어머니는 사립문 밖 숨죽여 경계하시고 아버지는 묵묵히 진지 드신다.

우리 형제 물끄러미 바라보시고 말씀 한마디, 웃음조차 없이 떠나신다. 그렇게 우

리는 슬픔 한 자락 깔고 공포와 불안 속에 떨며 살았다. 해방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내 나이 9살. 해방이 되었어도 초근목피로 호구지책을 책임진 소년가장.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나이 60이 되어 흔적을 찾는다. 유품으로 초라한 전

투 복 2벌과 다비 한 켤레. 그나마 머슴이 작업복으로 떨궈 사라진 지 오래다.

아버지를 잠결에 만난다. 꿈속에서 만나는 아버지를 찾자고 월악산을 뒤진다. 산 정산에

서 골짝골짝, 절벽 위, 아래, 개골창까지. 레지스탕스의 발자취를 찾아 제천, 단양, 충주….

시청에서 동사무소, 면사무소, 이장, 반장 집까지 자료 있을만한 곳을 샅샅이 찾았다.

책 26질(帙), 어른 키와 맞먹는 분량의 ‘독립 투쟁사’와 마주했다. 며칠 밤 지새워

찾았지만 아버지는 안계시다. 말뿐일까.

숱한 날 자료를 뒤지다 망연자실. 보다 못한 책 주인이 “그만 접읍시다.”

그렇게 돌아 온 마을 어귀, 거나하게 술취한 친구가 반색을 한다. “오늘이 3?1절

이야. 군청에서 독립투사 자손이라고 초청받아 대접 잘 받고 오는 길일세.”

세상이 이런 건가. 그의 부친이 일인(日人)의 경찰이고 그 끗발로 호의호식하다

해방되자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교장까지 지낸 분인 걸 모르는가. 독립 항쟁하던 해,

3월 1일에 그의 조부가 독립만세 한 번 기똥차게 부른 흔적으로 아버지의 피 묻은

손이 깨끗이 씻겼단 말인가.

과거사 진상규명으로 나라가 흔들려도 부(匹夫)였던 아버지는 언감생심 끼어

들 한 치 틈도 없었다. 이 뒤틀린 세상, 오로지 꼿꼿한 양심을 고집한 아버지와 나

는 세상 잘못 살았나.

모든 것이 끝났다. 그도 유명을 달리 했고, 나도 죽음이 임박했다. 그의 아들딸과

나의 손자들이 태어났고 장성했다. 강산이 변했고, 파란 이념과 붉은 사상이 스며들

어 목청껏 외치다 제풀에 사라진 세상.나이 칠십. ‘평범한 인생’이란 제목으로

자서전 한 권 내니 문제가 생겼다. 글 속에 독립투사 이며 일경(日警)의 앞잡이인 그

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구절(句節)이 양가 사이에 금 그을까 아들 딸, 며느리가 내 눈치를 살핀다.

아버지 앞에 ‘평범한 인생’ 한 권 펼쳐 놓고 술 한 잔 올린다. 아버지, 나의 인생 한

토막 이승에 남겨두면 안되겠습니까.

- 이 글은 어느 독립운동가의 아드님이시며 나의 10년 연배이신 선배님의 이야

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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