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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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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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0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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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꽤 오래된 이야기다.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작가가 방한해 한국 만화가들에겐 시(詩)가 없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기는 틀렸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청 광장을 가로지르며 한마디씩 한다. 누가 돌 타일을 깔았어. 늦가을이지만 이마는 다리미로 지지는 것 같이 뜨겁다.

우리는 버스로 2시간을 달려 이 도시 중심가 예식장에 온 하객들로 운전수가 길을 잘못 들어 시청 반대편에 하차하는 바람에 광장을 오가며 불만을 토로하는 중이다. 

결혼식이 끝나 광장을 다시 가로지른다. 이번엔 이마 대신 뒷머리가 뜨겁다. 일행이 짜증나 이구동성하는 이 놈의 돌 타일. 수천 평에 이르는 광장, 바둑판 모양 돌 타일을 깔아 반사된 햇빛이 머리에 꽂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잔디를 심던가, 아예 잡초 밭으로 두었더라면 쾌적한 공간이 되었을 텐데.

돌 타일을 깐 사람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 짓을 했을까. 광장에 들어서면서 히틀러 시절의 군중과 광장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나치 정권의 다큐멘터리 영화 ― 밀집대형의 군대, 힘찬 보폭. 직각보행, 분열과 사열을 하던 제국주의 시대의 광장이 떠올랐다. 어느 군청 광장을 걸어본 기억이 있다. 

그 광장도 이와 다르지 않으니 공사를 시키고 감독한 공무원이나 공사를 시행한 자나 전체주의의 집단적 획일성이 향수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지.

광장 돌바닥 열기를 피하려고 정자에 앉으니 5,6개 정장에 청춘 남녀들이 오수(午睡)를 즐기는 중이다. 정자 사이로 심겨진 돌배나무, 사과나무, 밤나무들이 돌 타일에 놀라 눈에 생기를 주지만 낙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걸 보면 이 식물들도 타일에 어지간히 질린 모양이다.

열기를 식혔으니 커피 한 잔 하자고 시청 건물로 들어서니 서너 살쯤 됐을까. 빨간 치마에 상의는 벗어버린 속내의 차림의 꼬마 아가씨가 맨발로 뛰어 다닌다. 피로연에 따라온 꼬마다. 이 건물 어딘가에 예식장이 있는 모양이다. 

건물 안팎으로 거니는 발걸음이 한가롭다. 시청을 시민들에게 통째로 내어놓고 공원화 하느라 꽤 애를 썼다.

그러나 관공서는 올곧고 엄숙하며 만민의 귀감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 따라서 관공서는 신성시되어야 하며 조용하고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언행과 품위 있는 태도, 그리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야 하는 곳이다. 그것이 제대로 안돼 공무원 윤리 강령이니, 공직기강강화니, 공무원 징계 양정의 두께는 해마다 불어난다.

시청이 공원이 되고 보니 눈에 띄는 것이 절도나 공사(公私)의 구별이나 칼 같은 예의범절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비싼 돈 들여 광장을 돌 타일로 깐 사람들이 무슨 재주로 질서와 규범이 생명인 공무원들을 자연인이 마구잡이로 드나드는 길목에 세워 올곧은 행정을 수행하게 할 수 있을까 겁난다.

돌 타일 광장에서 왜 일본 만화가의 시(詩) 타령이 생각날까.

몇 년 전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은 시인이라면 미친놈으로 치부하던 때가 있었고, 지금 이 시장에게도 시가 있을 턱이 없으니 그 일본 만화가를 욕할 일이 아니다. 

유신 시절, 높은 산 뚝 자르고 계곡을 메워 마구잡이 부지 조성하는 꼴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이 “겁나서 개발하라는 말도 못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어느 건설업자가 강변 경치 좋은 산을 헐어 팬션 주지를 만드는데 깎아내고 파내고 넓힌 꼴이 모진 악동 골난 표정이니 차라리 안 한 것만도 못하다.

만약 공사 현장에 시인 또는 화가 한 명만 있었더라면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가가 아니라도 공사를 시행한 사람에게 시가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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