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서설(序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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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설(序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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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2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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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가짜는 옛날부터 진짜와 쌍둥이였다. 요즘처럼 가짜에 민감하지 않았고, 배척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돈으로 입학한 대학생들 기사가 대서특필되니, TV, 라디오, 매스컴이 아우성을 쳐 나라가 흔들린다.

그러나 ‘언제는 안 그랬느냐’는 의구심과 왜들 극성을 떨까, 오히려 경망스런 그들이 이상했다.

6, 70년대 도저히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 자들이 하나, 둘 대학생이 되어 대학을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선생이 되던가, 굴지의 회사 중역이 되기도 한다. 아무도 탓하지 않고, 세상 그러려니, 가짜 선생에게 배우고, 가짜가 되어 가짜를 만들며,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사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진짜가 가짜를 포용하고 가짜가 진짜에 기생하며 살아도 무관한 세상인데, 하루아침에 가짜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도둑처럼 남들 평생 고생해 벌어들이는 돈벌이, 잠깐 사이에 가짜를 만들어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도 있다. 거품경제, 사리사욕, 흥청망청하는 말들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현대는 풍요나 여유의 시대가 아니다. 상대방이 잘살도록 내버려두면 어느 틈에 내 밥그릇을 넘본다. 거대 기업체가 콩나물, 고추장, 된장, 간장 장수에서 엿장수까지 몽땅 해 먹어 웬만해선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라 눈 부릅뜨고 경계하기 시작하면서 가짜와 진짜의 공생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닌지,

가짜를 들추다보면 의리는 물론 국민성까지 흠집 내기 마련이다. 요즘 개인주의가 팽배해, 믿을 만한 사람 없고, 과거 정리(情理)에 하소연하기도 힘들다. 가끔 검찰 조사 받다가, 상사에게 누 끼칠까 목매달던가, 투신자살로 함구하는 기사(記事)도 향수로 남았다.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모래시계’의 압권은 “나 지금 떨고 있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심리(審理)를 거부하고 오직 친구 검사(檢事)의 심리만을 고집하는 주인공일 것이다. 사형에 이르는 목숨, 가짜일지언정 심판은 깨끗한 인간 ― 진짜를 고집하는 마지막 절규이다.

세금 비리가 터졌다. 세무 공무원이 세무 공무원을 조사하다보니, 조사하던 공무원이 비위 사실로 걸려들고, 조사한 공무원은 자기가 조사한 것을 없던 걸로 해달라 애걸복걸이다. 세금 떼어먹는 공무원은 당연히 척결되어야 하지만, 한 가정의 파멸을 못 견뎌하는 눈물이 목 메인다.

아물만 하면 다시 도지고, 잊혀질만하면 다시 터지는, 이 지겹고도 그칠 줄 모르는, 고달픈 가짜 행렬의 근원은 무엇일까. 해방되던 해, 미군정으로 시작되는 관공서, 일제 순사, 헌병에 빌붙어 먹던 친일파, 조선시대 매관매직하던 탐관오리, 신라 처용의 아내와 놀아나던 화랑….

초등학생 시절 어느 날, 우리들 과업은 돌 10개씩 주워 오기였다. 오랜만에 강가에서 노는 재미에 빠져 의무를 잊어버렸다. 누군가가 외친다. “선생님 화나셨다.” 엉겁결에 돌을 나른다. 하나, 둘, 셋, 넷…. 실적표에 내 것은 2개가 더 올려져 있다. 놀라, 입 딱 벌리고 선생님을 쳐다보니, 모른 척 다른 선생과 얘기 중이지만, ‘너는 모범생이고, 나는 너의 아버지와 친구고, 너는 나의 아들과 친구고….’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선생님은 내게 가짜를 가르치셨다. 아들을 아들의 친구인 내게 부탁하셨다.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친구 사업은 망했으며,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집마저 불탔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한다. 선생님의 호의는 무위로 끝났고, 나는 죄인으로 남았다.

가짜는 델리케이트해서 좀처럼 보이지 않고 정교하고 미묘해 스쳐 지나는 그림자 같은 것. 분별하기 힘든 청포묵 껍질, 또는 원형질막 같은 것.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붕괴되던 날. 당사자들에겐 하늘이 조각조각 찢어지고, 땅덩어리 갈라지는 아픔이겠지만, 구경꾼에겐 타다 남은 담배꽁초만도 못한 것이라 토목건축이나 구조물은 전혀 몰라, 나와 무관하다 돌아섰는데, 뒤통수 호되게 때리는 소리. “너의 가정과 직장은 확고부동, 견고하고, 정직하며, 흠 없다 자신할 수 있느냐. 추호의 균열이나 침하(沈下), 비틀림 없다 자신만만 말할 수 있느냐.” 돌아보니 아무도 없건만, 왜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밑도 끝도 없이 얽히고설킨 실타래. 가짜를 찾아 질주하는 진짜 속에 가짜가 얹혀, 가짜가 진짜를 몰아낼 힘을 기르고, 진짜가 없어져야 비로소 가짜가 소탕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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