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마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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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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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2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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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육군 소장이 국정 감사장에 나와 비밀문서를 흔들고 섰다. 월드 컵 열기로 까맣게 잊었던 6월 어느 날의 서해교전과 전사한 병사들, 도발 가능성을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묵과한 군 수뇌부에도 놀랐지만 더욱 경악하게 하는 것은 비밀문서를 든 육군 소장이다.

세상이 놀랐으니 1면 톱기사로 신문도 다루었겠지. 안경 낀 격앙된 눈과 입, 비밀문서를 치켜든 긴장된 손, 이마와 볼에 새겨진 주름으로 보아 6?25 사변, 3?15 부정선거, 4?19 민주 항쟁, 그리고 햇볕정책에 이르는 현대사를 꿰뚫어 잘 아는 지도층 인사이며, 육사 출신으로 의리나 충성, 정의와 상명하복의 군인정신 또한 투철할 것이겠지만 “이런 상관에 복종하기보다 전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라는 단서를 붙여 까발리니 혼란스럽다.

요즘 사나이가 없어 김두한 주인공의 드라마 ‘야인(野人)시대’의 시청률이 높다고 한다. 남자들에 유전하던 의리, 무덤까지 가는 죽음의 맹약, 배신을 쫓는 단호한 칼날들이 한 줌 향수로 남았다. 사나이가 사라지는 것은 공동체 중심에서 개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필연적 현상이지만 직접 원인은 정치인들 배반의 미학이라고 한다. 구국의 결단이니, 정계개편이란 이름으로 철새가 되어 배신하고도 멀쩡하게 살아남는 풍토에서 사나이가 공존하겠는가. 그리고 그 배반의 레이스는 권력의 누수로 이어져 어느 정권 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

연세대학 정과리 교수는 ‘나를 2번 놀라게 한 청년’이란 칼럼에서 붉은 악마들의 문화가 집단 정서에 불과하다고 한다. 애국, 애족, 한국인의 피가 펄펄 끓는 청년의 문화요, 조국을 이끌 새로운 모럴이라 생각했지만 이념도 정신도 아닌 즐거움이고 쾌락의 정서적 집단주의라니 기가 막힌다. 명품 구매 붐, 성형 수술 바람, 게시판 문화, 자살 사이트, ‘친구야’를 유행시킨 조폭영화, 왕따 만들기. 뜬금없이 끓었다가 느닷없이 식어버리는 냄비현상.

아버지 대의 표상인 의리와, 젊은 아들의 정의인 이념을 잃었으니 조국은 텅 빈 마당이다. 이 텅 빈 마당에서 70을 바라보는 기업인의 말을 들어보자. “앞으로 중국 때문에 망할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미국, 전 세계가 망할 판이다. 인해전술의 중국인들이 싼값으로 만들어 팔아대는데 당할 자 누구인가. 중국물건이 조악해 냉대를 받았지만 날이 갈수록 기술이 향상되어 판매량이 증가한다. 각국의 볼 베어링의 강도를 자기 회사에서 시험했다고 한다. 베어링을 오 함마로 깨는데 미제는 금만 가고, 일제는 조금 깨어지고, 국산은 아사삭 바스러진다. 중국제는 국산을 넘어 일제를 넘본다.”

문명의 서진설(西進說)을 믿어 동북아에서 일본은 문명 수혜국이니 끝장났고 중국은 아직 멀어, 21세기는 한국이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지만 공염불이 되었다. 기업들이 빌딩에 불 밝혀 두뇌를 짜 만드는 것은 은행돈 쉽게 빌리는 방법이던가, 적자 장부(帳簿)를 흑자로 변조하는 것이다. 선량한 사업가는 망하게 되어 있다. 남의 돈 뭉텅 뭉텅 떼어 먹고 은행돈 떡 주무르듯 해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얼굴들, 터져봐야 몇 달 감방에 살다 나와 다시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이다.

족집게 과외가 있다. 1,000여 마원의 고액인 이유는 글자 한 자 안 틀리고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가르치니까 족집게다. 문제를 이미 알던가, 그 문제가 나오게 만드는 것이 족집게 선생의 역할이다. 그렇게 공부한 학생들끼리 친구가 되고, 커서 정부 고위직에 들어가, 삼부요인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정부를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으로 인생을 조작하는 법을 배워버린 그들에게 놀아난 건 누굴까.

전자시계, 계산기, 웬만한 공구는 made in china, 핸드폰 바테리는 made in japan, 중장비는 hitach, 컴퓨터마다 intel inside. 참다못해 “포항제철은”하고 대드니, 남의 나라 원석(原石) 사다 인공(人工)을 가(加)해 되파는 것에 불과해, 뜨겁고 위험해 기피하는 것을 기술, 기계 몽땅 빌려다 사용하는 것이라 한다. 자원이 부족하고 기술도 딸리며, 원친도 무시되고, 꼭 대시에서 말단까지 누가 더 약은가 내기 중이다.

“단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것이 있다면 여자 남자 만나, 어린애 만드는 것만은 확실해. 그건 틀림없는 국산이지.”

6,70년대 항간에 나돌던 유행가 가사 같은, 70대 기업인의 농담조차 설 자리가 없다. 의리가 사라진 아버지와, 정신마저 끊긴 아들의 텅 빈 마당에서 새삼 그의 농담이 왜 이리 그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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