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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1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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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어려서부터 어른 모시는 법을 배우며 컸다.

밥상에서 길거리에서 들판에서 골목에서 언제나 맞닥뜨리는 어른 앞에 공손해야 했고, 어른의 그림자마저 밟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 착한 어린이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자라는 정석코스로 접어드는 길이었다.

모시고 살았다. 공직 사회란 피라미드 구조이며 발 한 번 잘못 디뎌 삐끗하는 날이면 한꺼번에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자리라 윗분이라면 하느님 모시듯 했다.

오래전에 박정희 교(敎)란 게 있었다. 자칭 박정희대통령을 하느님처럼 받들어 모시며 자기들은 박정희 교를 믿는 신도들이라고 했다. 중앙정보부장 시절 이후 락의 말이다. 당시 공무원들이 그 말을 철칙으로 믿었고 상사 모시기를 그와 같이 하기를 기꺼워했다. 출근하면 커피는 드셨는지, 점심 식사는 어디로 모실까, 퇴근 시간이면 약주는 어떻게….

패러다임이란 게 무섭다. 청사 안에 대형식당을 만들어 점심 식사를 해결하니 상사 모시기가 수월해졌고 사고방식도 빠르게 변화했다. 퇴근 시간이면 졸병이 상사 주안상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상사가 같이 마셔 줄 술친구 찾는 꼴이 되었다. 여북하면 술은 내가 산다. 같이 한 잔 하자 해도 “선약이 있어서…. 됐어요. 저희 생각일랑 마세요”라는 말씀이다. 화난 과장이 “내 더러워서, 너희들하고 술 먹으면 내가 개다”라 했을까.

일전 태국여행 중에 현지 교민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사업도 바쁠 텐데 새벽부터 사원과 짜오프라야 강이며 현지 농장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의 동생이 KOICA(한국국제협력단) 태국 현지 소장이면서도 권위의식이 없이 외국에서 만난 동포를 따뜻하게 대하는 성의가 아주 고마웠다면서 그의 형인 내게 극구 칭찬일색이다. 방콕 번화가에 대형 식당 3개를 운영할 만큼 성공한 그가 KOICA 소장의 끗발을 이용하려 하거나 아부로 하는 말은 아니다. 요즘 공무원 신분도 아닌 끗발이 먹혀 들어갈 리 없고 그런 시절도 아니다.

방콕 어느 고궁에선가 한국 학생 20여 명이 자전거를 타고 동생 앞에 몰려들었다. “소장님. 소장님.” 고만고만한 앳된 여학생들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베트남에서 봉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태국에 들렀다고 한다. KOICA에서 학생들을 모집해 현지 파견과 지도를 맡아 했다고 해도 소장님, 소장님 하며 따르는 환한 웃음들이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다. 그것은 권위주의 파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생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결재과정을 지켜 본 적이 있다. 여직원이 바쁜 결재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상사 앞에 결재 받는 태도나 몸 배배 꼬는 꼴로 보아 나라면 한바탕 혼을 내고, 버릇을 고쳐 군기를 잡을 텐데, 동생은 아니다. 이것이 무엇 무엇이 잘못 되었고 저것은 이렇게 저렇게 고쳐야 된다고 조근조근 일러주고 결재란에 사인을 해 준다. 한 핏줄 나눈 동생이라도 나와 판이하게 다르구나.

세월은 흘러 파쇼로 군림하던 내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2, 3년 지나고 보니 악다구니같이 싸우던 후배들도 흰 머리 희끗희끗하다. 연말이라 오랜만에 점심상을 같이 했다.

아주 천천히 밥을 먹었다.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인간으로 태어나 조국의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날들과 변화와 순환하는 과정들이며 영원히 사라지는 날들까지 기나긴 이야기를 했다. 점심 밥 한 그릇 먹는 한 시간 동안 창 밖에 해 뜨고, 달 지고, 별이 쏟아져 내리고, 눈 내리고, 비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30여 년이 흘렀다.

어른 또는 상사 모시는 것만 섬김이 아니다. 후배와 밥 한 그릇 마주하는 섬김. 그런 섬김 하나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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