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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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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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2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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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그 때가 전성기였어.”

세무 부서에 근무하던 시절 이야기를 하던 친구의 말이다.

전성기라니. 어떤 전성기. 영자의 전성시대. 주지육림에 돈 봉투가 난무하던 전성기.

전성시대의 사전적 의미는 한창 왕성한 시대이다.

경관 좋다 싶으면 가든으로 먹자 판 식당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걸 보면 한국인들은 돈 왕창왕창 벌던 시기를 전성시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학자들의 안목으론 한 국가 한 시대의 전성기는 문화적으로 얼마나 융성했는가를 따진다.

따라서 머릿속 지식 몽땅 쏟아 붓고, 혼신의 심을 다 바치고도 모자라 동맥 뚝 끊어 콸콸콸 피 쏟아 붓고 싶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면 전성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전성기는 언제일까. ○○계장 시절, 70년대, 80년대 아님 김 과장과 함께 근무하던 때…. 7,80년대의 퇴비 독려와 새마을 운동, 그리고 논보리 재배, 조춘경(早春耕) 독려, 보릿고개를 없앤 산업의 역군이라 자부하던 시기일까.

새마을 운동은 박대통령이 죽자 서서히 사라졌으니 빛바랜 전성기이고, 조국 근대화의 역군도 세무비리와 빈번한 대형사고로 명목이 무색해졌다. 술과 고기로 잘나가던 시절은 남이 볼까 두려우니 전성시대보다 탐욕의 시기다.

따져보니 박 과장과 근무하던 2년 동안의 행적이 가장 뚜렷하고, 10여 년 전 반듯하게 닦아 놓은 도로가 아름다워, “그 때 박 과장이 잘 했지요”하니 “그걸 박 과장이 했어. 정부 돈으로 했지.” 10여 년 전 포장해 달라 졸라대던 입이 변했으니. 내 고장 위해 일했다 자랑하고 싶던 전성시대도 접는다.

공무원의 전성시대라면 국민을 일깨우고 선도 한다는 자부심으로 혼신의 힘을 쏟아 붓던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계도할 지식은 있기나 했고, 따라주는 주민은 있었던가. 의지의 날(刃) 세워 투지를 불사르던 날이 며칠이나 될까.

동창생을 만났다. “○○계장이라면서 왜 그렇게 사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굽실거리며 늙어 가는 내 꼴을 보고 서슬 퍼렇던 젊은 너는 어디 갔느냐는 비웃음일까. 지사(志士)처럼 짧고 굵게 살라는 말일까.

짧고 굵게 사는 영웅시대. 지지부진하게 사느니, 미시마 유끼오처럼 배 쫙 찢고, 모가지 뎅겅 잘라 영웅이 되고 싶지만, 이 시대 마지막 영웅들은 역대 대통령으로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 수모를 당하니, 물욕으로 유전하던 전성기는 몰락한 영웅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영국 여자 공무원이 출근길에 지하철을 탄다. 빈자리를 내어주니 “No, Thank you" 하며 거절한다. 빳빳하게 다림질한 옷에 구김살이 갈까, 서서 출근하는 그녀의 프라이드가 부럽다. 내 자존심은 어디 갔을까. 사무실에선 신문조차 읽지 못해 주민들만도 못한 정보와 지식으로 전전긍긍하고, 검·경찰, 신문 기자에게까지 쩔쩔매던 나날들. 민원인들에게 눈 부라려 기죽이던 일(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도스또예프스끼의 ‘지하생활로부터의 수기’에서도 나오는 걸 보면, 세계적 동서고금을 망라한 현상인 것 같다. 그러니까 겁도 없이 이렇게 쓰지)만 생각나니 프라이드는 찾을 길 없다. 먹고 살기 위하여, 돈을 위하여, 그럭저럭 살아온, 그렇게 비만의 땀 흘리는 육신으로 비씨카드 한 장 들고 슈퍼마켓을 찾으니 가난한 정신사는 돌봄 틈이 없다.

20년 공직생활 중, 한 권의 소설도 읽지 않았다는 말은 자랑일까 자조일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근무시간에 신문을 왜 못 읽게 했을까. 민원인 앞에 두고 신문 보는 몰상식한 공무원이 있을까. 오히려 졸병 유식한 꼴 보기 싫다는 말로 들리니, 내 삐뚤어진 심사일까. 보지 말라는 신문이 모든 책으로 확대되어 전 공무원이 무식해진다.

신문 못 읽게 하니 가뜩이나 책 안 읽는 국민, 우민화 정책(?)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공무원은 주민이기를, 주민은 공무원이기를 바라는 습성이 있다. 쌍둥이처럼 서로 답습하며 저속한 습속으로 빠져드니 저질화에 가속도가 붙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니 눈치 볼 필요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중인환시(衆人環視) 속, 음란 싸이트에 들어가 별의 별 짓 다해도 일 하는 줄 아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공직을 마감하고 도서관을 찾는다. 내 영혼의 정신사는 이제야 시작이다. 저 많은 책을 한꺼번에 읽는 방법이 없을까. 나이 60이 내일 모레. 죽기 전에 몇 권이나 읽을 것이며 읽어 무엇에 쓸까.

누군가, “글을 쓰신다구요. 지금 나이면 베스트셀러작가는 되어 있어야지. 이제 배워서 언제….”

너무 늦었나.

그러나 노후의 여유로 읽고 쓸 생각은 없다. 못 다한 전성기, 동맥 툭 끊어 콸콸콸 피 쏟는 전성시대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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