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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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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수필가)

| 중앙신문=중앙신문 | 우리내외는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할 때, 주로 전철을 이용한다.

전철을 타고 다니면 운전을 안 하니 몸이 편하고 산천이나 풍물 구경을 하니 눈이 즐겁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간이매점에서 커피를 사서 마시는데 분위기가 썰렁해도 재미가 있어 구두쇠인 아내도 별말을 안 하고 즐긴다.

종이컵에 팩으로 된 커피를 담고 물을 부어 빨대로 빨아 마시는데 그 값이 900원,얼마나 싼가. 그윽한 향이나 맛이 비싼 것이나 똑 같아 좋고, 다 마시면 물을 다시 부어 내외가 번갈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전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이런저런 지나 온 세월을 반추하니 그 또한 의미가 있다.

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건 또래들 보다 훨씬 빠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먼 촌 누님이 다방에서 일을 했는데 가끔 불러 용돈도 주고 그 당시 유행하던 모닝커피_ 연유와 계란 노른자위를 넣어 커피를 끓여 주면 커피 향 뿐 아니라 단맛이 좋아서 잘 마셨다.

어렸을 적, 6.25 전쟁이 끝나 갈 무렵 우리 동네가 시골임에도 구호품으로 미군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나누어 주었다. 갖가지 과자, 잼, 통조림, 육류 등 먹을 것과 봉지에 든 가루도 들어 있었는데 시골뜨기 우리들은 그게 무엇인지 몰라 살짝 혀로 맛을 보고는 쓴 맛에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그것이 커피였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이다.

시절은 유행처럼 변하여 커피의 종류도 엄청나게 많아지고 맛도 천차만별이니 세상 좋아졌다고나 할까. 대학에서 조차 커피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니 커피로 밥벌이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커피 전문가가 커피를 타고 그 위 프림에다 그림을 그리는데 하도 멋져 재주가 비상하다고 감탄을 했던 적이 많았다.

커피 맛이 쓰디써서 분유, 연유, 생우유를 넣어 마시며 각자 입맛에 맞추더니 이제는 블랙커피가 대세다. 어디에서 잠깐 보니 커피, 프림, 설탕을 1 : 2 : 3의 비율로 탄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너무 달 것 같다. 나는 오래전부터 머그컵에 커피 한 숟가락을 타서 마시는, 블랙커피 마니아 이다.

맛이 다르듯이 값도 제각각이어서, 150원짜리부터 만원이 넘는 것 까지 여러 가지다. 몇 해 전 후배와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데, 식대보다 많은 커피 값을 내고 씁쓰레 해 했던 적이 있다. 사람 놀리는 것인가. 커피 값이 밥값보다 비싸다는 것은 나이 든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비정상이다.

다방 아니면 맛 볼 수 없던 커피, 이제는 전문점도 많이 생겨나고 재벌그룹에서도 커피장사를 하는 판이니 나라가 커피세상이 되었고, 믹스커피가 널리 보급되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즐길 수 있으니 왼 통 커피도원이 되었다.

시골사람들, 들에 일을 하러 갈 때도 커피는 필수품이 되었고, 90넘은 우리 어머니는 물론, 촌로들도 식사 후에는 의례 커피를 마신다. 맛에 맛이 꼬리를 물어 이제는 커피 없으면 암흑 세상이 되었으니...

시골 영감들 대여섯이 다방에 들어선다. 종업원들이 벌떡 일어나며 아양을 떤다. 다방이 시골 면소재지까지 들어 차 늙은 농사꾼들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다. 마을에서 화투를 치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가 저녁때 쯤 집에 가기 전에 커피 한 잔 하자고 몰려다니는데, 시골다방만의 멋과 맛이 있고 삶의 지혜가 숨겨져 있어 농한기 틈을 내어 잠깐 여유를 만끽하는 그들에게 다방은 더없는 놀이터가 된다. 시골다방에는 주로 중국동포, 탈북여성들이 종사하는데 순박하고 서로 대하기가 편하며 그쪽 사정 이야기 듣는 것도 흥미가 있어서 자주 들른다.

시골다방에는 구수한 커피와 함께 주름살 사이로 보이는 촌로들의 온화한 미소가 있고, 고달픈 세월을 이겨낸 농부들의 끈기가 배어 있다.

커피 한잔으로 지난 세월을 지우거나 고치지는 못하지만 시골 다방은 좀 더 낳은 세월을 위한 대화의 장(場)이 되기도 한다.

가난했던 대학생시절,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친구들과 어울려 캠퍼스에서 하염없이 거닐다가 겉옷을 하얗게 덮은 눈을 털어내며 장작불 활활 타는 난롯가에 앉아 한 잔 커피를 마시는 낭만, 차가운 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고 한 모금 마실 때 그 향, 달콤하고 구수한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건 주머니 사정으로 자주 가지도 못하던 다방의 유혹이 생각나서인가 보다.

다방을 연락처로 정해 놓고 한 구석을 차지한 채 종일을 버티는 가난한 사업가들도 생각이 난다. 이제는 다방에 죽치고 앉아 세월을 낚을 일도 없어지고, 다방이 아니어도 사람 만날 장소가 많다보니 한 집 건너 다방이었던 거리 풍경도 모두 바뀌어 다방 구경하기가 어려워 졌다.

대도시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커피 맛, 다방의 정취, 개발연대 이전을 떠올리게 하는 시골다방의 풍속도, 요원의 불길처럼 지칠 줄 모르게 번져버린 시골커피문화는 서민의 가슴을 열게 하고, 적은 비용으로 시간을 보내게 하니 농촌생활의 부분이 되었다.

커피, 새로운 재미로 자리매김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로 말뚝을 박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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