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늙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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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늙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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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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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잠에서 깨어나니 차는 인터체인지로 진입중 이다. 운전 중인 아내는 어둠 속에서 고속도로 티켓과 잔돈을 찾고 있다. 나라면 “다 왔어, 웬 잠을 그리 자. 통행료 내야지¨하며 다그치겠건만, 아내는 명멸하는 불빛과 질주하는 차량, 익숙지 않은 고속도로, 불확실한 시야 속에서 장거리 야간 운전을 끝내면서도 술로 골아 떨어진 남편의 잠 깰까 노심초사다.
이런 아내다. 아내에게 나는 뭘까. 오로지 출세만을 위하여 가정은 도외시하고 근엄한 척, 친절하고 부지런한 이웃인 척, 훌륭한 인격자인 척, 하루를 소비하고 집에 들어서면 잔소리와 폭언을 일삼고 상사에게 받은 구박과 동료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몽땅 아내 탓으로 돌리는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조상들 대대로 아내 두드려 팰 장작 개피 찾는 남자, 밥상 뒤엎고 술 주전자 동댕이치는 남자, 권위와 매몰참으로 통제와 감시 기능으로서의 남편과 다를 게 무엇이냐. “난 안 그럴거야···하며 주먹 불끈 쥐던 어린 나는 어디로 갔는지. 나는 퇴직한 뒤 몇 달 무위도식하며 뒹굴었다.
30여 년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풀려 주름살이 펴지는데 아내의 주름살은 깊어만 간다. 늙다니. 아내가 늙다니. 퇴직은 내가 했는데 아내가 늙다니. 바람나 퇴직금 날릴까 전전긍긍해, “내 재주에 여자 꼬실 능력 없고, 내 인품에 따를 여자 없다고 일축해 한 시름 놓은 걸로 아는데. 더구나 평소에 하던 잔소리 끊고, 못살게 군것도 없는데. 빈둥거리는 내가 불쌍해 그럴까. 어디 아픈가. 보험 이 안 되나(아내는 보험 설계사다). 졸졸 따라다니며 요 눈치, 조 눈치 살피지만 알 수가 없다.
고심하다 근원을 따지니 돈이다. 통장 재고가 바닥나는데, 말은 못하고 앓고만 있다. 연금이 적다는 말이 차마 안 나온 모양이다. 그런 아내다. 아내에게 살림살이 맡기지. 쌀 한 말, 고등어 한 손, 돼지고기 한 칼 사들고 다니는 꼴 보면 째째한 놈이라 욕한 내가 잘못이다. 살림살이 아내에게 짐 지워 놓고 훨훨 멋대로 날아다닌 죄가 크다.
죄 많은 나는 달리고 또 달린다. 막내아들 입대하던 논산 훈련소를 돌아, 시계바퀴를 거꾸로 돌리며 둘째 아들 가면(假面) 놀이하는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를 건너뛰고, 시간의 반대방향으로 나뒹굴어 3살짜리 큰아들과 놀고 있는 30년 전의 아내를 찾아 교회운동장에 와서 숨을 몰아쉰다. 교회 운동장, 교회에서 진리가 나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부장적 부권사회에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시동생과 남편으로부터의 도피처일거라 폄하(貶下)하기도 했다. 아내는 초록 스웨터를 입고 파란 바지 끝을 양말 속에 넣어 몸 매무새 단단히 하고 아들의 세 발 자전거를 밀어 주고 있었다.
아내의 복장은 10여 년을 두고 똑같았다. 아내의 얼굴은 붉고, 언제나 남들 보다 붉어 창피했다. 이제는 창백해, 그 때 그 얼굴 다시 보고 싶다.
아내의 턱은 길며, 너무 길어 흉잡히지 않을까 겁나기도 했다. 지금은 너무 짧다. 그 긴 턱 다시 한번 만져보고 싶다. 아내의 목은 길다. 보다 길어 이상하기까지 했다.
이제 작아져 불만스럽기까지 한 기다란 목 모딜리아니의 푸른 눈(잔 에뷔테른의 초상)을 연상시키는 향수의 목. 어느 여류 수필가가 긴 자기의 목을 쓰다듬으며 백만 불짜리 목이라 자랑하던 날, 잃어버린 아내의 목이 아쉬웠다. 아쉬웠던 젊은 아내를 끌어안고 키스한다.
아내의 이마에, 아내의 눈에, 아내의 뺨에, 아내의 목에, 턱에, 그리고, 그리고…, 마침내 아내의 입술을 찾는다. 세 살짜리 아들이 부신 눈으로 올려다보니, 목사님은 황급히 돌아서고, 뜻 모르는 교인들이 와르르 몰려나오자, 울타리에 수많은 눈들이 까르르 웃는다.
“안 내려요.···아내의 목소리에 웃는 담장의 수많은 눈들이, 쏟아져 나온 교인들과 목사님이 없어졌다. 젖꼭지를 빠는 아들과 젊은 아내가 돌아보는 것 같더니 안개처럼 사라졌다. 차는 집 앞에 정차한다. 다시 잠이 든 나를 아내가 깨우고 있었다. 깨우는 아내가 늙어 가고 있다. 장모님의 뒤뚱거리는 걸음 거리를 닮아가고, 긴 목은 주저앉아 6살 많은 언니를 쫓는 중이다. 그녀의 언니를 닮은 선배와 찾은 문학강좌엔 여자들만 꽉 찼다. 2년 전부터 공부하는 철학반엔 남자가 나 하나다. 버스를 타고 보니 운전사가 여자다. 식당, 카페, 노래방… 여자들 세상이다. 세상이 좋아졌다. 그러나 아내는 늙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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