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는 인간의 조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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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는 인간의 조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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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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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과속 단속 카메라에 찍혀 과태료를 내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 없다. 예고된 단속 카메라는 안내판이나, 차량속도의 흐름, 앞차의 머뭇거림으로 감지되어 웬만하면 걸리지 않지만, 예기치 않은 곳에 세워진 이동식 단속카메라 앞엔 당해낼 재주가 없다. 오늘도 과태료를 내는 꼴을 지켜보며 아내가 “아예 네비게이션을 달아요” 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 자제력이란 게 있다.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해선 안 될 행위에 선(線)을 긋고 넘지 말자고 약속하고, 욕구를 억제하며 사는 것이 사회생활의 규범이고 문화인으로서의 긍지다. 교통 규칙의 하나인 규정속도를 못 지켜 GPS에 내 의지를 맡기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3년을 지냈고 과속 과태료는 네비게이션 몇 대 값은 족히 웃돈다.
목사님, 스님, 선생님에게 물었다. “네비게이션이란게 인간이 필히 써야 할 도구인가요.” 모두들 웃고 대답을 피했다. 피한 이유를 나중에 알았다. 종교인 자동차에 GPS가 있었고, 대학교수 자가용에, 내로라하는 정치인의 자동차에도 네비게이션은 있었다. 바쁘고 골치 아픈 세상, 자동차 속도 조절 정도의 의지는 GPS에 맡기고 생산적, 고차원적 정신 활동에 몰두해야 한다는 말씀이지만 핑계로 보이니 인간 조건의 한 가지는 포기한 것 아닐까.
TV에서 10여 세 안팎의 초등학생이 그 아비와 유행가를 열창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 어렸을 적엔 유행가를 부르면 퇴폐적인 세속에 빨리 물들어 건전하게 자라지 못한다며 꾸중을 듣고 금기하던 일이다. 어쩌자고 어린 자식에게 유행가를 가르치고 잘한다 부추기다 못해 TV에 나와 온몸 바들바들 떨며 춤까지 추게 할까. 더욱 이상한 것은 방청객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러워하니 인간 조건 두어가지는 포기한 꼴이다.
요즘 인생의 목표가 TV에 한 번. 나오는 것. 평생 열심히 공부하거나일해서 유명한 도사나 박사, 정치인이 되면 영락없이 TV에 나온다. 따라서 TV에 방영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목표 선점의 첩경이라,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도덕이니 양심은 뒷전일 수밖에.
교통법규에도 문제는 있다. 도로사정이나 자동차의 성능이 수십 배 좋아진 지금, 몇십 년 전의 숙도 규정에 맞추라니 토끼 보고 거북이를 닮으라는 꼴이다. 언젠가 왕복 2차선 도로에 시속 60Km에서 70Km로 변경한다는 말이 무성하더니 어느 틈에 슬쩍 사라져 버렸으니 국민을 위한 법인지, 단속을 위한 법인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며 독배를 마셨지만,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법은 피해가는 것이지 지키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회 풍조는 더 많은 인간 조건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더 빨리, 더 편하게. 신속하고 원활하게 이동하기위하여 길 닦고 성능 좋은 자동차를 만드나 했더니 너무 빨라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그 카메라 잡는 GPS를 만드는 혼돈의 세상.
“오빠 화끈하게 해줄게.”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핸드폰 광고와 스팸 메일의 관능 앞에 인간이기를 고집할 젊음이 몇이나 될까. 팽팽하던 활시위는 끊어졌다. 인격, 지성, 양심, 고상한 품격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 “너의 통장 재고를 보여줘. 너의 가치를 평가해 줄게”
양심의 가책, 도덕이란 잣대는 집어치우고 물질 ―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인간이기를 포기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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