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읽기, 그리고 살아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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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읽기, 그리고 살아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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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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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수필 쓰기의 유혹은 뿌리칠 수 없는 열병이다. 쓰고 또 쓴다. 그리고 찢는다. 불안한 것은 내가 쓰는 글의 불확실성이다. 확실성의 추구, 알기 위해 읽는다. 읽는 다는 것은 지평에 이르는 시선의 확장이며 사유의 끈질긴 탐색이다.
혹자는 수필을 시장 바닥 만큼 떨어뜨려야 한다지만, 독자들은 이미 시정잡배가 아니다. 본대로 느낀 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진 글은 읽지 않는다. 글 속에서 땀 냄새가 나야 하고, 피가 튀어야 하며, 꿈틀거리는 정염이 있어야한다. 플라톤, 니체, 헤겔이 비치기도 하고, 포스트모던, 양자역학, 나비 효과, 프랙탈이 공존해야 한다. 구태의연한 권선징악, 흘러간 유행가, 선한 목자의 재탕을 쓰고 읽어 주길 기대해선 안 된다.
워싱턴 어빙은 ‘저작술’에서 글쓰기는 유명한 시인들의 글 조각을 모아 누더기 한 벌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이라 했고, 보르헤스는 “말은 이미 동어반복(同語反覆)으로 쓰여졌다. 주석(註釋)으로써 글쓰기, 요약하는 척할 뿐이라는 멘트 정도로 절하시킨다. 목월의 ‘나그네’에서 조지훈의 ‘완화삼’을 읽기도 하고 가르시아 마르케스에서 귄터 그라스 또는 플로베르를 읽을 수도 있다. 대상과 문체는 공유되고 시각의 차이만 남는 것은 아닌지. 창작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글쓰기를 폄하하여 베끼기라 한다면 1권의 책을 읽고 베끼느냐 500권을 읽고 베끼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지식 지향의 수필을 질타하기도 한다. 지혜로 수필을 쓰라는 말이다. 경험이나 직관도 학습이다. 인간이 이루어 놓은 잡다한 사유와 이론들의 총체가 수필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 생활 속의 철학을 고집하는 것은 임어당을 빙자한 지식의 외면이며, 안일에 빠지기 위한 자가당착이다. 쓴다는 것은 본질 찾기이다. 카프카의 소설 또한 인간과 인간을 에워싼 세계의 본질로 읽어야 한다. 태초 이래 인간이 추구해온 철학을 도외시한 면벽수도만으로 본질 찾기에 성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요즘 수필가들로부터 ‘가벼운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 때마다 나는 밀란 쿤테라를 떠올린다.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주는 가벼움의 뉘앙스 때문일까. 쿤테라의 소설은 속도감이 있고 생생히 살아나는 현실감이 있다. 구태의연하지 않으며 작가의 나이에 비해 20대 청춘인양 젊디젊다. 그리고 가볍다. 그러나 가벼움 속에 철학이 있다. 철학의 무거움을 가볍게 쓴다는 것은 방대한 지식이 지혜로 발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쓰는 글을 한 달 후 찢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써야 한다. 그리고 읽어야 한다. 쓰고 읽고 찢는 것은 명징성을 찾는 것이며 본질로의 접근이다. 본질 찾기는 시지프의 신화 같은 것, 반복된 실패와 반복된 시도는 ‘성(城)’의 주인공 K이며 초라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초라한 몰골로 길거리를 헤매는 나는 내가 만난다면 어떨까. 프란츠 카프카는 현대의 모형을 그의 소설 ‘성(城))’에 담아 놓았다.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다. 주인공 K.는 잘못된 초청장으로 성(城) 아래 마을에 들어오지만 아무도 반겨주지 않으며 성으로 올라가려는 노력은 언제나 실패한다. K.는 보이지 않는 미로의 복도에 서 있다. 끝에 도달 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복도는 누가 언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는 제도에 얽힌 세계이다. K.는 서류상 착오의 그림자이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태어나서 기록되고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주민등록번호 ― 관공서 서류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K.의 세계는 죄에 따른 벌이 처벌되는 곳이 아니라 처벌된 죄를 만드는 도치된 세계이다. 인민재판에서 일관된 벌에 의해 처단되고 개인은 처단된 벌에 따른 죄를 자백하며 사생활은 공개된다.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고, 변호사는 변호사가 아니며 교사는 교사가 아닌 거대한 행정기구의 관료들이다. 전체주의에 모형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똑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 속에 사는 우리들이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카프카는 종교 또는 심리소설로, 사회학적, 정치학적, 전체주의, 자본주의의 비판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인관과 세계의 원초적인 가능성, 인간을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맹목적인 의무, 가릴 필요도 없는 치부, 내려진 벌이 억울해도 수용하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메커니즘과 복종, 그리고 기계와 추상적인 관청을 세계로 확장시키고 비극은 희극으로 뒤바뀐다. 동정과 슬픔 없이 이웃의 죽음을 바라보는 현대인은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며 잃어버린 비극의 위안과 강탈당한 고독으로 우리들을 하찮은 존재가 되어 추락한다.
추락하는 나를 따지기 시작한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의 하루에서, 1주일과 1달과 1년과 살아온 내 인생 전반을 뒤적인다. 숨 가쁘게 달려온 기나긴 하루하루들이 모여 이루어 놓은 내 짧은 일생, 역사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는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다. 그러나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으며, 못다 쓴 글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마지막 위안이다. 들어갈 수 없는 성에 오르는 K.처럼 열리지 않는 수필의 문을 두드리며 발견되지 않는 또 다른 진실을 찾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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