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잇새에 끼이고, 목에 걸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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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잇새에 끼이고, 목에 걸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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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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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1월 말, 공과금을 내려고 농협에 들르니 시간이 너무 이르다. 대부분 9시에 시작하지만 이 농협은 30여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자동인출기 코너에서 통장 정리를 했다. 아무 것도 찍힐 것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기다리기가 무료해 넣어본 것이다. 통장을 뽑아 돌아서는데 챠르르르 발밑에 돈이 쏟아진다. 시퍼런 만 원권 20장. 놀라 주워들며 “웬 돈이야” 하며 옆의 여인을 돌아보니 “지금 막 나간 여자 것인가 봐요” 한다. 문을 열고 찾아봤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들어와 통장 갈피에 돈을 끼워 넣고 서성인다. 갑자기 돈을 든 손이 남의 손같이 어색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돈을 줍는 순간부터 양심의 나침판이 바들바들 떨고 있구나. 더구나 목격자 --이 여자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남들은 자동 인출이니, 자동 이체니, 자기 할 일 끝내기 무섭게 떠나건만, 유독 이 여인은 감독인 양 떠날 줄 모른다. 농협 앞이 버스 정거장이라 추워지면서 인출기 코너가 바람막이 대피소가 된 걸 생각하면 그녀도 버스 승객에 불과하겠지만. 돈 임자 기다리는 것이 안 해본 짓이라 여간 어색한 게 아니고, 슬며시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기만 하다. 농협 문이라도 열려야 공과금을 내고, 이 불편한 돈을 직원에게 맡기고 떠나련만. 이 돈, 슬쩍 가져. 찾으러 온다는 보장도 없고, 잃어버린 돈이라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고, 빼앗거나 훔친 돈도 아닌데. 농협 직원에게 맡긴다 해도 주인을 찾아준다는 보장도 없고, 가로채지야 않겠지만 주인을 못 찾아 불우 이웃돕기를 한답시고….
그러나 저 여자는 어쩌고.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혀 이리저리 뒹구는 불확정 다수의 대중 속에서 유독 너만 기억할까. 혹시 주인이 너를 찾는다 해도 갚아주면 될 거 아냐. 빨리 튀어. 다섯 발자국만 건너뛰면 성능 좋은 네 차가 기다리잖아.
그러나 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제로 섬(Zero Sum)게임 ―번 자의 돈과 잃은 자의 돈을 합하면 언제나 0(零)이 되는 법칙. 따라서 많은 번 자가 있으면 많은 잃은 자가 있어야 하고, 웃는 자가 있으면 우는 자가 있어야 하는 규칙. 나의 행복은 너의 불행을 딛고 피어나는 꽃. 내부는 격렬하게 요동칠지라도 표면은 언제나 냉정(0)을 잃지 않는 잔잔한 호수. 어느 틈에 양심 한 조각이 정의를 앞세워 “이 돈 쓸 때, 세상만사 뜻대로 형통하는 줄 알겠지만 쓰고 난 뒤 더 궁핍해지고, 죽는 날까지 덫으로 남아 마음 괴롭힐 생각을 해봐” 하며 야무지게 쏘아붙인다.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머저리 같은 자식, 궁한 판국에 갖고 튀지. 잘나빠진 양심은. 혹시 저 놈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반반 나누어 먹자고할까. 아니지, 네가 뭐야. 주인에게 돌려준다면 할 말이 없지.’  ―그러니까 나는 잘하고 있는 거야. 기다려 보자. 천사, 원래 착한 어른, 어려서부터 쭈욱 범생이었잖아. 오만 가지 생각이 들끓고, 시간은 지루하고, 샷터는 열리지 않고, 직원은 왜 나와주지 않는 거냐.
10여 분 지나니 코너가 붐비기 시작한다. 미니스커트가 들어왔다 나가고, 학생들이 드나들고, 할머니 한 분 매무새 단단히 하고 들어와 서성이나 했더니, Mrs.원이 들어와 자동인출기를 가동 중이다.
이 돈을 들고 쩔쩔 매는 꼴이 보이기 싫어 그녀를 피해 돌아서 있는데 유난히 상기된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서자마자 인출기를 샅샅이 훑어보고 낙심천만이 되어 “그럼 그렇지, 있을 턱이 없지” 하고 돌아선다. 이 여자다. 아주머니, 돈 잃었어요. 네. 이 돈 가져가요. 주변이 숙연해지며 뭐야. 돈 찾아 주는 거야.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어. 낙심천만의 여인, 말을 잊었다. 아주머니, 재수가 … 좋군요. 슬쩍 … 가져가고 싶지만 … 양심의 가책으로 … 남을 것 같아서 … 이제 나도 … 편하군요. 말이―, 말이―, 왜 안 나오냐. 나오는 말이 잇새에 끼이고, 나온 말도 목에 걸리는구나.
평생, 안 해본 선행(善行)이 왜 이리 낯설고 불편하냐.
문을 열고 나서는데 Mrs. 원이 “어머, 정초부터 복 받으실 일 하셨네.” 천만의 말씀, 복을 받다니. 악이 일상에서 천사의 문턱을 잠시 머뭇거렸을 뿐인데. 얼굴이 왜 이리 화끈거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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