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자의 소혜(笑慧)칼럼]수첩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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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자의 소혜(笑慧)칼럼]수첩을 정리하며
  • 중앙신문
  • 승인 2018.01.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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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자(수필가, 본지 칼럼위원)

새해를 맞이할 때 마다 새 수첩에다 지난해에 적어둔 이름과 전화번호를 옮겨 적으며 정리하는 일이 습관화 되었다.

첫째 장 맨 윗줄에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 생년월일, 주소를 쓴다. 다음은 남편, 셋째 칸부터 두 아들과 며느리 둘, 손자 셋, 손녀 셋의 이름을 적고 전화번호와 생년월일도 적는다.

스마트폰에 다 아는 이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입력해 두지 않고 굳이 수첩에다 성명, 전화번호 때론 주소를 적는 이유가 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내가 알고 있는 이웃들의 이름을 적으면서 얼굴을 떠올리고 그와 만나게 된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스마트폰을 먼저 누르지 않고 가방에 넣어둔 수첩을 꺼내어 이름과 전화번호를 찾아 이용하는 버릇에 길들여 있어 더 편리하게 느껴진다. 이름표 옆에 달려있는 숫자를 눌러 사람을 만나고 번호를 외우며 안부도 묻고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 게 번거롭거나 귀찮다고 여긴 적이 없다. 1994년(54세)에 흉선암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그동안 모아둔 수첩을 가계부와 함께 다 태워버린 후 다시 모으기 시작한 수첩이 스무 개가 넘는다.

수첩은 이름들이 사는 마을이다. 늦은 세월에 알게 된 사람의 전화번호는 당연히 제일 뒷동네에 그 이름이 오른다. 친척과 외척, 초등학교동무, 중·고등학교 친구, 대학 동창, 자주 가는 맛 집, 이용하는 병원, 우리 동네 포레스트힐 주민, 수필교실 회원, 수영장 회원, 주문처명단이라는 마을 간판을 내걸고 그 밑에 이름과 상호의 전화번호를 적는다. 해마다 기록되는 장수가 줄어드니 내 삶의 범위가 축소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올해도 나를 불러줄 사람, 내가 도움을 청해야 할 이웃들이 번호표를 달고 줄줄이 기록되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 든든한가.

십여 명이 넘는 이름을 단축번호에 저장하고 수백 명의 지인을 연락처에서 찾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편리하게 사람을 찾는 일 보다, 수첩을 꺼내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고 번호를 소리 내어 말하면서 꾹꾹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면 번호를 외우게도 되고, 상대방은 보이지 않아도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올 해도 내 수첩의 하얀 마을이 이름과 전화번호로 새 단장을 하고 빼곡히 끼리끼리 눌러앉아서 소통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자주 찾아가는 마을도 있고 한 해가 다 가도록 그냥 지나치는 이름도 있다.

수첩을 정리하다보니 작년 한 해 세상을 떠나 부르지 못할 이름을 만났다. 형부, 조카, 친한 친구의 이름을 삭제하면서 지금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허무함에 눈앞이 흐려온다. 형부는 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을 홀로 사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세상을 떠난 친정조카는 나보다 세 살이 아래여서 큰올케언니가 아버지 없는 나를 업고 조카는 안고 젖을 먹이며 같이 키웠다고 한다. 조카는 간암 말기에 병이 발견되어 1년간 투병하다 숨을 거두었다. 한 동네에서 여중 여고를 같이 다녔던 내 친구는 예쁘고 인정 많은 요조숙녀인데 오랜 투병 끝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한주일 전 친구네 집을 찾아가 우리는 둘이서 나란히 누어 옛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복수가 차 있었고 다리는 퉁퉁 부어있었다. 우리는 수타 자장면을 시켜서 같이 먹었다. 친구는 국수 몇 가닥도 잘 넘기지 못했다. 그 게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살아있을 때 더 잘해주고 자주 찾아가 주었어야 했는데 지나고 나니 아쉬움만 남는다. 인간은 헤어진 후에야 사랑을 깨닫고 후회하면서 사는 어리석은 존재인가 보다.

매달 다섯 번의 모임장소와 시간을 적고 매주 수요일엔 수필수강이라고 표시해 둔다. 가족들의 생일이 적힌 월별 계획표를 마지막으로 옮겨 쓴 후 손때 묻은 지난해의 수첩은 만남과 헤어짐의 추억을 간직한 기록물이 되어 보관 상자로 들어간다. 지난날의 역사가 담긴 검정색, 갈색, 주황색수첩들이 나란히 세워져 추억을 간직하고 서 있다.

나와의 소중한 인연들이 담겨있는 귀중한 수첩. 약속 장소와 시간이 메모된 지난날의 수첩은 발자국만 남긴 채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내 이름 석 자도 누군가의 수첩에 기록되어 있겠지. 훗날 내 이름을 지우며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오늘 새 단장을 마치고 가방 속에 자리한 내 주황색수첩은 귀중한 소지품 1호가 되어 한 해를 잘 살아가도록 길동무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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