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순 칼럼]눈고양이의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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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칼럼]눈고양이의 인사
  • 중앙신문
  • 승인 2017.12.2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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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수필가, 칼럼위원)

온 세상이 하얗도록 눈이 내리던 날, 이젠 나보다 더 키가 커진 손녀딸이 언 손을 불어가며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런데 동그란 눈덩이가 세 개다. 눈사람이 치마 입은 거냐고 묻는 나에게 ‘아니요, 눈사람이 아니고 눈고양이예요. 여기 눈도 있고 귀도 있는걸요.’ 하며 손녀가 웃는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영락없는 고양이다. 잘도 만들었다. 눈으로 만든 고양이는 손녀만큼 큰 키로 반듯이 서서 웃고 있다. 눈으로 만든 고양이가 재미있어 사진을 찍으며 나도 자꾸 웃음이 났다. 하필이면 눈으로 고양이를 만들다니. 고양이든 사람이든 눈으로 무엇을 만드는 아이의 마음이 이미 우리를 행복하게 한 것 같다. 그렇게 눈고양이를 마당한가운데 세워두고 대문 앞에 쌓인 눈을 치운 후 나는 아이들을 따라 서울나들이에 나섰다. 한 닷새 집을 비우며 내 머릿속에선 눈고양이가 지워져 버렸다.

비워두었던 집으로 들어서니 세상 어느 구석에 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게 커다란 위로와 함께 평안으로 밀려왔다. 그 평안의 공간을 휘 돌아보는 내 눈에 한겨울 햇살을 받으며 서있는 눈고양이가 들어왔다. 혼자 지켰을 마당엔 어느새 남아있던 눈도 거의 녹고 없는데 햇살에 몸이 녹았는지 비스듬해진 채 눈고양이만 집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꼭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이다. 나는 사진을 찍어 아이들에게 보내며 ‘눈 고양이가 인사 한다’고 썼다.

눈사람도 아닌 눈고양이가 집을 향해 기울어진 모습을 보며 나는 혹시 햇살에 녹아 쓰러질까 걱정이 앞섰다. 장갑을 끼고 그 몸체를 바로 세워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눈덩이는 꼼짝을 않는다. 갑자기 불어 닥친 한파에 녹다말고 그대로 얼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눈고양이는 집을 향해 인사하며 마당에 서있게 되었다. 아니 이미 그렇게 서있는 걸 바로 세울 수가 없어서 나는 그저 그대로 두기로 한 것뿐인지도 모른다.

날은 추워도 낮이면 햇살에 녹아 점점 몸이 기우는 눈고양이를 나는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번 불어온 한파 때문인지 조금씩 몸을 낮추면서도 눈고양이는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전날보다 더 겸손해 지며 점점 허리를 굽혀가는 그 모습은 저녁에 집에 들어설 때마다 그리고 아침에 커튼을 열고 마당을 내다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처음엔 75도 그리고 60도, 50도, 35도 이렇게 기울어가더니 이젠 25도 정도로 낮아졌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짓궂은 지인이 발로 차서 무너뜨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 장난 끼에 눈고양이가 동강나 무너질까봐 난 깜짝 놀라 말렸다. 그냥 스스로 땅에 닿는 순간 까지 그대로 두고 싶었다. 저렇게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그저 고맙다고 공손히 인사하며 녹아가는 고양이의 모습이 처음엔 재미있다가 이젠 조금씩 숙연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고양이는 열흘이 넘도록 집을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곧 코가 땅에 닿을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많은 눈이 왔다. 낮이면 조금씩 녹아가던 눈고양이 위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렸다. 그새 고양이는 몸을 더 낮추고 머리엔 흰 미사포를 썼다. 인사하나 했더니 기도하고 있었다. 조금씩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을 느끼며 점점 몸을 낮추어 인사하더니 이 아침엔 기도를 한다. 그 모습을 마주하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깊은 감사는 기도가 됨을 깨달으며 나는 무엇인가에 온몸과 맘으로 감사하고 산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잠시 지나가는 감사가 아닌 삶 자체로 드리는 감사, 그것을 저 눈고양이가 지금 나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온 몸이 땅에 닿는 그 순간 까지 오로지 감사하나로 인사하고 고요히 기도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 삶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이다. 아무 미움이나 원망도 없이 억지로 버티는 고생도 없이 햇살과 추위 속을 고요히 살다가는 눈고양이를 눈 오는 아침에 내가 만나고 있다.

아직도 눈고양이는 마당에 엎드리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인사할 수 있어서,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나는 저 깊은 감사를 흉내라도 낼 수 있으려나. 흩어져 내리는 눈송이 속에 나 또한 기도가 되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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