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순 칼럼]12월엔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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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칼럼]12월엔 언제나
  • 중앙신문
  • 승인 2017.12.0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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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수필가, 칼럼위원)

다시 12월이 왔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무겁게 다가오는 이 한 달은 많은 일들을 떠오르게 한다. 생각조차 나지 않는 숫한 일들이 삶속에 묻혀서 가는 모래처럼 세월의 파도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고운 모래 속에서도 까끌거리며 뭍으로 밀려오는 조개껍데기나 돌멩이 같은 기억들을 주워들어본다.

그 많은 날들이 다 사라져 버려 허전하기도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날들에 허둥대며 바빠지기도 하는 마음을 나는 해마다 이 시간이면 어쩌지 못하고 있다. 문득 떠오르는 말, ‘다사다난했던 한해’라는 그 말이 떠올라 나는 빙긋이 웃는다. 여느 해처럼 올해도 내가 한해를 다사다난하게 살아낸 것이다.

기특한 나 자신에게 한 장 남은 12월의 달력은 수많았던 숙제의 마지막 장처럼 홀가분해 보인다. 긴 여정의 끝에서 받는 스탬프 같기도 하고 어쩌면 한해를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분이 주시는 편지 같기도 하다. 달력이 팔랑일 때 마다 이런 속삭임이 내 귀에 들린다. ‘특별히 잘 한 일이 없으면 어떠냐. 잘못한 일 좀 있으면 어떠냐. 그래도 그게 다 잘해보려다 그렇게 된 것인 걸. 수고했다, 사느라고.’

잘한 일은 없고 잘못한 일은 많았다. 그러나 지나갔다. 지나가는 것이 축복인 것도 이젠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지나가지 않고 같은 일이 한없이 되풀이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고문일 것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단풍들어 떨어지면 눈도 오듯이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어서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것도 지나가고, 괴롭고 힘든 것도 지나가고, 그래야 새해도 오고 봄도 오겠지.

지난해 12월엔 어떻게 살았을까? 지지난 해에는 또 무엇을 했을까? 기억을 더듬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아득하기만 하다. 아마도 지난해에도 한해를 돌아보며 꼭 하려고 했던 일들을 떠올리고는 서둘러 그 일을 마무리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앞에 놓으면 그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난 무엇을 마무리하려고 애쓰게 될까? 내 삶의 12월이 오면 정말 누군가 나에게 속삭여 줄까? 사느라고 수고했다고. 상을 못 받으면 어떠랴.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만 남기고 가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자유롭게 떠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내가 12월이면 오래전부터 꼭 하던 일이 하나 있다. 나는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몇몇에게는 옛날처럼 손으로 카드를 써서 보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카톡에 떠도는 연말 메세지나 영상카드면 됐지 아니면 e메일로 보내는 카드면 족할 일을 무슨 손으로 쓴 카드냐고 하면서도 그 카드를 받는 지인들은 예외 없이 기뻐한다.

내가 카드를 써서 보내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도 다 못 찬다. 카드를 고르고 안에 편지 쓰고 주소를 써서 우체국으로 가는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묘한 설렘을 가져다준다. 가급적 카드는 반짝이는 것을 고른다. 어린 날 카드를 만들 때면 동생과 서로 은가루 더 많이 뿌리려고 싸워가며 놀던 추억 때문인지 듬뿍 은가루가 묻은 카드를 고르려고 한다. 난 아직도 마음이 유치한가보다. 그러나 그 시절 내게는 귀하게만 보였던 그 반짝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분들 앞에 아낌없이 뿌려 보내고 싶다. 그렇게라도 한해를 살아낸 기쁨과 감사함을 전하고 삶의 허전함 또한 달래고 싶기 때문이리라.

이제 서둘러 카드를 사러 나가야겠다.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니 그 많은 날들을 살아낼 수 있도록 내 마음에 힘이 되어준 얼굴들이 떠올라 나는 이미 행복하다. 은가루대신 감사함을 듬뿍 뿌린 카드를 골라 한해를 살아 온 것을 축하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있어주어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내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생을 다 살아낸 안도와 감사함을 남기고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시 12월이다. 그러나 12월이 오고 또 가는 사이 무엇인가 조금씩 달라진 다. 나는 차츰 나이 들어가고 내 손녀는 키가 쑥쑥 자란다. 그래도 여전히 주어지는 세월을 힘껏 살고 있다. 잘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시간을 스스로 용서하고 또 다시 주어지는 새 날들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그리고 늘 마음으로 동행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고맙다고 조용히 손 내밀어 보면서. 해마다 12월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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