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희의 문화유산여행]천년의 명당, 융건릉에 잠든 정조와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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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희의 문화유산여행]천년의 명당, 융건릉에 잠든 정조와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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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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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희 (궁궐문화원장)

| 중앙신문=중앙신문 | 꿈을 이루기 불과 4년여를 앞두고 승하하신 정조는 지금 어디에 잠들어 계실까?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에 이어 오늘은 정조가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계신 융건릉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소나무가 시원하게 뻗어있는 숲길에서 오른쪽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이, 왼쪽에는 정조의 능인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던 사도세자의 무덤이 ‘릉’인 것은 고종(광무3년)시기에 추존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즉위를 하자마자 아버지께 존호를 올리고 ‘묘’를 ‘영우원’으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정조13년에 지금의 위치로 능을 이전,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었다. 현륭원, 즉 융릉의 자리는 윤선도가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번 만날 수 있는 곳’이라 했던 천년의 명당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전할 당시 그 곳에는 백성들이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살고 있던 백성들을 수원화성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한 정조는 다음날 이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한다. 집주인의 이름과 집 크기, 논 밭 보상 면적 등 보상에 필요한 직접적인 조사였다. 사흘 뒤에는 내탕금을 내려 보내 보상금 지급에 문제가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주가 결정된 날로부터 5일 만에 이주민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이주를 시작하게 했다.

보상금 지급시기도 놀랍지만 보상금 또한 백성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주민들에게 거래가보다 더 많은 금액을 주도록 한 것이다. 특히 봉분 확정지 주변 주민들에게는 추가로 50냥씩을 더 지급하도록 했다. 당시 집 보상비가 244가구 약 1800여 칸으로, 원가가 3457냥이었지만 실제 보상금 지급액은 7569냥이었다. 2배가 넘는 보상금이 지급된 셈이다.

2008년 우리나라를 슬픔에 빠지게 했던 숭례문 방화사건을 기억한다. 당시 방화범의 범행 동기가 토지 보상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즉 토지 보상금에 대한 불만은 국보 1호 숭례문을 삼켜버린 것이다.

지금의 시대에도 하기 힘든 보상금 지급, 정조는 왜 그렇게 많은 금액을 보상금으로 지급했을까? 이는 바로 정조의 효의 정치였다. 아버지의 묘를 이전하는데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다면 그 원망은 고스란히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갈 것임을 정조는 알고 있었으리라. 백성들의 원망을 최대한 줄여 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정조가 할 수 있는 효도였다.

정조의 효도는 보상금 지급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현륭원은 세자의 신분으로 생을 마친 아버지의 묘로 ‘왕릉’은 아니었지만 정조는 ‘왕릉’급에 버금가는 격을 갖추었다. 그래서 다른 왕릉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규모와 격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융릉에서 눈여겨 볼 것이 병풍석과 무석인이다. 융릉에는 모란과 연꽃으로 장식한 병풍석을 둘렀다. 일반적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은 추봉된 능에는 생략하는데, 융릉에는 화려한 병풍석을 두른 것이다. 무석인은 칼을 차고 있는 석인으로, 오로지 왕릉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특징이다. 무석인을 세운다는 것은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왕릉이 아닌 곳에는 함부로 세울 수 없었다. 그런데 세자의 묘였던 현륭원에 무석인을 세운 것이다. 병풍석과 무석인은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었으리라.

융릉의 좌측에 정조의 무덤인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죽은 자의 공간에서 상석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다. 그런데 아버지보다 상석에 아들 정조가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의 무덤치고는 위치가 수상쩍다.

건릉은 처음부터 융릉의 왼쪽에 자리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융릉의 동쪽에 조성되었었는데 정자각에 탈이 생기고 봉분위의 사초가 무너지는 등 계속된 사고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정조임금이 살아생전 노상 다녀가던 이 곳은 이제 시민들의 가족 나들이와 소풍 장소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정조임금은 이 시대의 가족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승하하신 뒤에도 부모님의 곁을 지키는 융건릉에서 우리시대의 효를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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