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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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나기
  • 송년섭
  • 승인 2020.06.1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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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계절이 여름의 시작이라지만 날씨를 보면 아직 봄의 끝자락이라는 말이 맞다. 앞 산 도토리나무의 연한 이파리는 아직 연두색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논둑에 자란 쑥이며 잡초들이 덜 여물었다. 그러나 곧 여름이 온다는 징조는 곳곳에서 신호를 보낸다. 비닐하우스에를 들어가면 열기가 후끈하고 미루나무 이파리들은 높은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논과 밭, 비닐하우스를 가득 채운 농작물들의 활기차고 싱싱한 몸매에서 여름을 느끼게 된다.

여름은 오는 방법이 다르다. 봄은 오는 둥 마는 둥 눈치를 보며 눈을 흩뿌리고 황사를 날리며 심술궂은 꽃샘추위를 몰고 다니다가 반 발짝 한 발짝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민다. 아주 소극적이고 너무 소심하다. 여름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선다. 햇볕이 봄보다 다정다감하고 열정적이다. 바깥마당 담벼락에 기대어 선 라일락이 화려한 향기를 뿜어내고 뻐꾸기 울음이 가까이 혹은 멀리서 애절해지면 이제 여름은 우리 곁에 바짝 다가선 것이다.

작물들은 무한의 경쟁시대를 살되, 동물이나 사람과 다르다. 먹이를 앞에 두고 서로 으르렁대며 혼자 먹으려고 힘자랑하는 동물의 세계, 이권을 보면 친구도, 스승도, 의리며 예의도 없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간들과는 전혀 다르다. 비료를 주면 함께 먹고 햇볕도 함께 쬐고 목이 마를 때 물을 주면 함께 마신다.

이때쯤이면 논밭, 비닐하우스의 작물들이 왕성하게 자라간다. 벼는 두 뼘은 되게 자랐고 밭에 심은 채소며 콩, 고구마, 감자, 땅콩이 싹을 키워간다.

앙증맞게 싹을 틔운 완두콩이 줄을 타고 키가 커가는 옆에서 토마토도 키 자랑을 한다. 벌써 수박이며 참외는 곁가지를 치고 뻗어 나간다.

하우스 안에 심은 고추는 어느 틈에 자라 손톱만한 고추를 수도 없이 매달았다. 이놈들이 자라서 풋고추가 되고 완두콩이 여물어 밀개떡을 만들어 먹을 즈음이면 완연한 여름이다. 논밭의 작물들도 왕성하게 생명을 키워가고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한국의 농작물들은 한국 사람을 닮았다. 물이 마르고 잡초가 곁 살림을 차려도 은근하고 끈기 있게 참으며 기다릴 줄을 안다.

제비가 두 번째 새끼를 치고 봄에 깬 병아리가 벼슬이 날 때 쯤, 시골은 조금 한가해 진다. 느티나무 그늘에 멍석을 깔고 노소가 함께 즐기던 쉼터의 풍속도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느티나무 아래서 어른들이 피우다 버린 풍년초 담배꽁초를 말아 도토리 담뱃대에 말아 피우며 팔자걸음으로 동네를 거닐던 아이들의 모습은 전설이 되어버렸다. 마을회관이 현대식 건물로 지어지고 취사, 냉난방시설을 갖추어 편안해졌다. 갓 수확한 감자를 갈아 빈대떡을 지지고 소주 한잔을 나누며 시름을 달랜다. 은근히 자식자랑도 나오고, 소식 없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도 도마에 오른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니 촌로들도 마을회관에 모여 조금쯤 여유를 부릴 수 있다. 농사지을 인구가 줄어 농기계가 발전하고 보급이 된 건지, 기계기구가 널리 보급되니 인력이 남아 도회지로 빠져 나간건지 모르지만 어느 곳이나 마을에서 젊은이와 어린이를 보기 힘든 건 오래된 일이다. 여름방학이 되어 손자손녀들이 내려오면 그나마 마을은 활기를 찾는다. 옥수수, 참외, 수박, 감자, 딸기 등등 먹을거리가 지천이다. 우리 내외도 아이들을 위해 봄부터 기술을 익히며 종자와 모종을 준비하고 무 농약 친환경 농법으로 과일 채소를 길러 왔다. 옥수수를 먹으며 하모니카 부는 시늉을 하고, 참외껍질을 누가 잘 깎나 시합도 하며 수박 빨리 먹기 시합을 붙여 아이들에게 한 가지라도 더 시골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묘안을 짜낸다. 파리모기도 예전같이 극성스럽지 않고 목욕시설도 집집마다 완벽하니 여름나기도 시대를 따라 진화하는가.

아이들은 매미채를 들고 산으로 들로 매미며 곤충을 잡으러 뙤약볕을 헤맨다. 내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며 아이들을 따라 다닌다. 옛날에 할아버지는 콩총대(덜 여문 콩을 불에 태워 콩을 익혀 먹었다)도 먹고 찔레나무 새 순의 대공을 벗겨 먹고, 여름에 장마가 끝난 후 물이 맑아지면 물고기를 잡으러 쏘다니고, 밤에는 이웃동네에 가서 참외 서리도 했다고 고해를 하면 아이들은 좋아라고 손뼉을 친다. 해 질 녘 바깥마당에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놓고 어릴 적 해먹던 콩총대 대신 옥수수를 구워주니 아이들 손과 입이 까맣게 색칠된다. 이맘때쯤에는 멍석을 깔고 어른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로 피로를 풀고 옆에는 말린 쑥에 불을 붙여 모깃불을 놓아 모기를 쫓았다. 엄마 무릎을 베고 잠이 든 아이들은 살 부채로 더위를 식혀줄 때 평온하고 행복하다. 달빛에 비추는 노란 호박꽃이 시골 여름밤의 정취를 더해준다. 선풍기나 에어컨으로 온도를 맞춘 침대에서 잠자는 요즘 아이들은 할아버지 세대의 고달픔을 모른다.

사람에게 청장년 시절이 있듯 작물에게도 청장년시기가 있다. 여름이 그렇다. 작물들은 이제 촌음을 아껴 몸을 불리고 영양분을 섭취하여 결실을 준비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 자란다. 사람의 정성이 보태지고 과학의 힘이 더해지니 금상첨화다.

예전에는 밀, 보리농사를 지어 여름 식량을 보탰는데 요즈음은 밀, 보리를 보기 어렵다. 그 대신 여름에는 장마철이 되기 전에 감자와 마늘을 거두어들인다. 날씨가 덥고 습도가 높아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썩어버리니 마늘은 한 접 단위로 엮어 추녀 밑에 매달고 감자는 얇게 펴서 말린 다음 용기에 담아 보관한다. 모두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진 마음씨다.

장마철이 되면 마루나 대문간에서 멍석을 만들고 새끼를 꼬아 가을을 대비하였는데, 이제는 공산품이 대신하는데 부피도 적고 무게가 가벼워 다루기가 쉬우니 멍석, 가마니 구경은 민속박물관에서나 할 일이다.

여름에는 해충들의 성화가 극에 달한다. 고추, 채소를 괴롭히는 잡초와 벌레들과의 싸움이 사람들의 여름일과가 될 정도이다. 친환경농법이니 무공해 농산물을 따르다 보니 잡초와 벌레들이 작물과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작물은 꿋꿋하다. 작물들은 오늘도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며 잘 자라고 있다. 그 계절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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