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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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여름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6.1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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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여름, 여름은 아름답다. 온 세상이 초록이다. 초록의 숲, 초록의 나무와 풀, 극성스럽게 자라는 녹음, 모든 식물이 하염없이 자라고 아우성치는 계절. 무서울 정도로 크고 길게 자라며 휘어 감고, 밀쳐내고 달리고 또 달리는 계절. 여기까지가 다른 여름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2018년 여름은 독특한 여름이었다. 덥고, 후텁지근하고, 끝간 데를 알 수 없는 열기. 도대체 이놈의 날씨는 누굴 닮은 건지. 올해 창조된 새로운 날씨인지. 몇년 전 태국에서 4개월 체류했던 날보다 더 지독한 했다.

열사熱沙의 나라 태국에서의 4개월도 이렇게 덥지는 않았다. 아무리 더워도 그늘에 들어가면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더구나 짜오쁘라야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나라에서 시시하게 솔솔,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커다란 장막을 휘날리며 무섭게 몰아치는폭풍이었다. 어찌나 시원한지 그 바람 앞에 서면 처녀도아기를 밸 것만 같았다.

가끔 태국 경찰들이 더위를 피해 아파트 앞 그늘에서짜오쁘라야 강바람을 맞으며 늘어지게 잠든 모습을 보곤했는데 처음엔 밉상으로 보였지만 그들도 얼마나 더웠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그것도 괜찮아 보였다. 공연히 더운데 억지 부리며 일하다 사고나 내는 것보다 좋은 일이며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서 정확하고 힘차게 일을 한다는 것이 더 생산적이 아닐까. 더운 날씨를 피해 잠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람 때문이었다.

이미 한 달을 두고 비는 안 오고 30안팎을 오르내린다. 시베리아 대륙성 고기압이 내려오고 북태평양 고기압이 올라와 샌드위치가 되어버린 기상도가 한반도를 불볕더위로 만들어 찜통이라고 한다. 어디를 가도 에어컨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에어컨을 한 대 가동하면 선풍기 20대 틀어놓는 것과 맞먹는다 해서 있어도 가동하지 못하던 기계였다. 요즘너도 나도 스스럼없이 가동한다. 문을 열어 놓고도 가동한다. 내부 공기를 외부 공기와 교체하기 위해서. 적어도 하루 한 번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옆에 있는 선풍기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요즘은 아내까지 에어컨 켜는데 겁도 없이 대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10분만 켜 놓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웬 돈이 많아서 에어컨을 쓰느냐 질색을 하던 아내였다.

그랬던 아내가 장장 다섯, 여섯 시간쯤은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는다. 어느 때는 무한정 켜 놓고 앉아 있기까지 한다. 아예 켜 놓고 잠드는 예도 부지기수로 늘었다.

도대체 전기세를 어찌 감당할 작정인지.

관공서도 그렇다. 옛날엔 가동을 억제했다. 특히 읍면장실의 가동을 더욱 강력하게 단속한 적도 있었다. 직원들 사무실에도 중앙 냉방식일 경우 아침에 잠깐, 점심에 잠깐만 틀어주기까지 했다. 어느 신문기자가 관공서에 들렀다가 그것을 보고 해도 너무한다는 제하題下의 칼럼을 신문에 낸 적도 있었다.

이젠 혼자 있어도 에어컨을 가동시킨다. 에어컨 켜는 것은 필수다. 따라서 모두들 에어컨이 작동하는 곳으로 몰린다. 가장 극심한 곳이 도서관이다. 가급적 집의 에어컨을 끄고 너도 나도 내 돈 안 드는 도서관으로 밀려든다. 꼭 글을 읽지 않는다 해도 이런 피서를 어디서 하랴. 당장 명산대천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가장 쉽고 편한 도서관을 찾는 것이다. 웬만큼 빨리 가지 않는 날이면 자리 차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집은 원래 겨울엔 따듯했고 여름엔 시원한 집이었다. 목조 기와 한옥이라 보기보다 시원했다. 누구나 들어와 보면 시원해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좋아하던 집이었다. 그런데 2년 전 강판 기와로 지붕 개량을 하고부터 여간 더운 게 아니다. 강판 기와를 올린 뒤 집을 완전히 버린 것이다.

아내에게 불만을 토하면 아내는 아니다, 지붕 위에 흙은 그대고 있고 초가지붕의 잔재나 기와지붕의 잔재가그대로 그 위에 방치되어 있다, 오로지 날씨가 덥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이웃집도 우리 집과 똑같은 한옥

이며 기와집이다. 그 집 주인의 답도 같다. 그러고 보니 아내 말도 일리는 있다. 강판의 열기가 즉시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 밑에 기와가 있고 초가의 잔재가 있으며 흙한 켜 그대로 쌓여 있으니 아내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따라서 집은 매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강판 지붕에 관계없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달아오른 집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글을 쓸 수 없다. 옛날 문필가들이 멀쩡한 자기 집 놔두고 왜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글을 읽는지 알 것도 같다. 맑스, 벤야민, 아도르노.

참다못해 도서관으로 뛰쳐나왔지만 그래도 글은 써지지 않는다. 분위기가 바뀌어서 그런가. 한 달이 다가도록 한 자도 쓰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읽는 일조차 힘이든다. 왜 이럴까.

불현듯 고추를 땄다. 뜨겁게 내리 쬐는 햇볕으로 하루이틀 사이에 빨갛게 익어버린 고추가 일렬횡대로 주렁주렁 매달린 여름의 조각들, 불타는 태양의 결정체.

짱짱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가 심장의 발동을 걸고, 힘차게 회전하는 발동기의 동력으로 지칠 줄 모르고 종횡무진 고추밭을 누빈다. 빨갛게 조각난 태양의 파편들을 따내며 극열克熱2018년 여름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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