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 쌀 . 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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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 쌀 . 쌀 .
  • 송년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6.1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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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송년섭 | 들판을 하얗게 메운 농부들이 모내기에 열심이다. 써레질을 마친 암소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새로 돋아난 풀을 뜯는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요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며 쌀은 우리의 목숨이다. 쌀농사는 가난한 우리나라의 기간산업이었고, 쌀은 화폐가치였으며 유통구조의 핵이며 몸과 마음의 고향이다. 60 년 전 농촌풍경이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1961년도 대학에 입학하면서 낸 나의 입학등록금은 108,000. 나의 아버지는 한 해 동안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 수확한 쌀 일곱 가마니를 19,800환씩에 팔아 농업은행 수표로 끊어 아낌없이 나의 손에 쥐어 주셨다. 입학금, 책값, 교복 값을 내고나니 내 손에는 아버지의 마음과 빛바랜 어머니의 얼굴만 남았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고 남는 쌀을 팔아 생계를 이끄는 집안 사정과 밥은 굶지 않았지만 6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며 늘 가난을 끼고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참으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오면 아버지가 가뭄 때문에 고생하시는걸 보아야 했다. 마을 위쪽, 두리봉과 승목골에서 내려오는 개울은 항상 말라붙어 개울 바닥을 파서 조금씩 고이는 물을 수멍에 연결하여 논에 대었다. 스무 마지기쯤 되는 벌자리 논은 우리 가족의 밥줄인데 농사철에 맞게 때를 맞추어 비가 내리는 법은 없었다. 아버지가 삽을 들고 나가시면 나도 뒤를 따라 나서야 했고 물꼬를 내느라 허리를 펼 새도 없이 삽질을 하곤 하였다. 하늘의 뜻에 따라 농부는 울고 웃어야 한다. 물 때문에 다툼도 잦았다. 언제나 너그러움과 따뜻함이 가득한 농부의 마음이지만 타 들어가는 벼 포기와 갈라지는 논바닥을 내려다보는 농심은 눈이 뒤집혀 이웃들과 티격거리고, 다시는 안 볼 것 같이 눈을 흘겨도 다음날 그들은 다시 논밭에서 물 걱정을 하며 웃었다.

장마가 시작되면 그때는 또 물이 넘쳐 걱정이었다. 둑이 무너지고 흙탕이 논을 휩쓸어도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쉬었지 하늘을 원망도 하지 못하는 바보들, 그게 농사꾼이다. 그나마 우리 논은 개울가에 있어 물 걱정이 덜 했고 개울둑이 높고 든든하여 다행이었다. 하늘과 자연은 인간을 괴롭히고 시험한다. 꽃샘바람을 일으켜 오는 봄을 주춤거리게 하고 한창 작물이 자라야 할 때 비 오는 걸 막아 애를 먹인다. 그 뿐인가. 수확 철에는 태풍을 몰고 와 다 익은 곡식을 물속에 잠가버린다.

학교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뭄걱정은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어느 해 시골에 갔는데 수리조합이 생겨 남한강물을 퍼서 농수를 대주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가는걸 보았다. 물 걱정 없이 논농사를 지으니 바로 천국이다. 농사를 짓는데 물 걱정이 없다면 농부에게는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일이다. 게다가 몇 년 후 수세마저 탕감하여 이제는 농민의 어깨가 가벼워 졌다.

낙향하여 노후를 소일하는지 벌써 10여년, 올해는 가뭄이 극심하여 걱정이 태산인데 논농사야 걱정이 없지만 밭농사는 물을 대느라 여념이 없다. 집 앞 얼마 되지 않는 밭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여러 가지 작물을 심고 아침 저녁 가뭄과 씨름을 하노라면 50여 년 전 아버지의 깊게 패인 주름이 생각난다.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않으시던 아버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면 나도 아버지만큼 자식을 위해 한 일이 있는지 반성해 본다.

1961년도 세계개발은행(IBRD) 통계를 보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 당시 독립국가 125개국중 101등이고 우간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파키스탄과 동급생 처지였는데 북한은 320$50, 포르투칼, 브라질과 비슷했다.

대학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식량의 무기화라는 단어는 50여년이 지났어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선진국이 군사무기뿐 아니라 식량도 무기화하여-당시는 한국이 제일 앞선 표적처럼 느껴졌다- 목을 죄면 꼼짝없이 식민지가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산업화가 성공하고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무역량이 증대하면서 이제는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섰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시던 아버지도 오래전 돌아가시고, 나라에서 물을 대어주니 논물을 대려고 개울바닥을 팔 일도 없어져 이제는 한자락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다만, 마음 한 구석, 생명의 원천이었던 쌀이 홀대를 받는 것 같아 씁쓸하고 조상 때부터 내려온 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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