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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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를 쓰면서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5.2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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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세종대왕 한글 전국 휘호대회 수상작품 전시회 축사를 써 내라 한다.

제목도 길다. 처음 휘호揮毫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다. 답은 먹물로 글씨 쓰는 대회운운하는데 아리송해 옥편을 들고 한문 글자를 찾아 뜻을 물었다.

[명사] 붓을 휘두른다는 뜻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이르는 말.

[유의어] 글씨. 휘쇄, 서화, 붓을 휘두른다는 뜻으로,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이르는 말.

5년 전, 한국예총 여주지회장 자격으로 수필, , 시조 강좌를 위한 예산확보를 위하여 군수를 찾았다. 군수의 말은 사업은 여주에서만 할 수 있는 사업, 다른 곳에서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사업을 찾아 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미 하거나 할 수 있는 사업은 특징도 없고 효과도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서 한글 휘호대회 같은 것.

청강서예 학원에서 김유영 회장이 군수를 찾아왔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님을 모신 자리, 영능에서 한문 싹 빼고 오직 한글로만 붓글씨를 쓰는 대회를 하고 싶다고 한다. 이 대회는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는 대회다. 오로지 세종대왕님을 모신 여주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여주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대회이며 여주가 꼭 해야하는 대회다. 여주의 선비들인 우리이기 때문에 이 대회를 꼭 해야만 한다.

군수는 무조건 승낙했고 예산을 세워 행사를 추진하게 했다.

나는 말을 잊었다. 그 앞에 무슨 토를 달고 시비 거리를 찾겠는가. 생각이 참신했고 뜻이 깊었으며 아름다웠다.

매년 대회가 있을 때마다 축사를 했다. 그때마다 이대회의 특별성을 강조하고 자랑했다. 순 한글로만 글을 쓰는 오직 한 곳뿐인 여주가 자랑스러웠다.

대회가 세종대왕의 업적을 자랑하고 빛내다 행사 자체가 여주를 빛내는 대회가 되고 말았다.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냐.

축사를 할 때마다 하는 말.

영어로 몸살을 앓는 한글, 제 나라 한글을 뒷전으로 치우고 영어에 혈안이 된 요즘 횡행하는 언어들. 이야기 몇 마디 나누면서도 우리는 수도 없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솔루션, 엘레강스, 시추에이션, 비주얼, 바우처, 데스크톱, 아이콘이젠 영어가 범람해 국어는 슬금슬금 떠나 버려 한글을 잊어 버릴 지경이다.

옛날 중국 말이 판칠 때 우리 말을 중국어로 하자는 맹랑한 주장을 한 사람이 있다. 북학의의 박제가. 그와 같이 지금 영어로 우리 말을 바꾸자는 사람들도 있다. 영어의 일상화, 영어 아니면 행세할 수 없는, 출세가 불가능한 세상이니 숫제 영어로 우리 말을 바꾸자는 사람들이다.

자기 나라 말 버려두고 남의 말 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나라 정서, 남의 감정, 남의 사고방식, 남의 습관으로 변질되어 자기 나라를 영원히 잃어버린 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오늘 오직 한글만으로 붓글씨를 쓰는 여러분은 참 애국자다. 오늘 하루만으로도 여러분은 한글을 빛내시고있는 중이다. 정진하시라.

수상자가 결정되었고 수상 작품을 자랑하는 가을 전시회가 열린다. 전시회는 아름답다. 푸른 하늘만으로도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우리 말 우리 글이 세종전에서 전시된다.

내가 가을에 하고 싶은 것이 문 창호지 바르는 일이다. 문짝 떼어내 묵은 창호지 뜯어내고 새 한지로 창호곱게 발라 푸우, 푸우 샘물 뿌리고 맑은 햇볕에 말려 다시 걸면 그날 저녁 귀뚜라미 소리는 얼마나 청아한지. 달은 왜 그리 밝은지.

그때의 감동을 전시장에서 만끽할 수 있다. 전시된 작품들은 한지에 향 담뿍 머금은 검은 먹물로 쓰여 있으되 흰 건 한국인의 마음이요, 검은 것은 세종의 언어, 한국인의 참된 글이로다. 한참 보고나면 내 어린 날의 어머니 치마폭에매달려빨래줄에하얗게널린옥양목사이사이를 뛰어 다니던 날의 그 광목 냄새와 푸근하게 감기는 감촉

이되살아나꿈속에서한참동안깨어날수없다.

수상작 앞에 서면 정갈하고 단정한 조선의 젊은 선비들 앞에 선 것만 같다. 정좌하고 글 읽는 단아한 모습.

조선 500년을 이끌어온 기상.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흔들림 없는 저 정적속에서 정치와 사상과 철학과 과학과 해학이 솟아 나왔나니.

옷매무시 다시 하고 수상작을 읽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몸 삼기실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우리의 정신사精神史 살아 나오고 미래를 비춰주는 등불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국,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 어느덧 흥취와 환상 속에서 깨어나 전시장 밖에 나오면하늘은 더 푸르고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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