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가, 다음에, 쉬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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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다음에, 쉬었다가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3.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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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고추밭 두둑을 만들다 날이 저물어 내일 하자고 남겨 두었다.

다음 날 비가 왔다. 다행이다. 힘에 부치는데 하루쯤 쉬어야 한다. 그리고 쉬었다. 그러나 아니다. 다음 날, 흙은 딱딱하게 덩어리 져 일일이 깨야 하고 바닥은 곤죽이 되어 파기조차 힘들다. 그저께 일의 두 배, 세 배는 더 힘이 든다. 아차, 힘이 들어도 마저 끝냈어야 했는데, 힘이 들어 쩔쩔 매는데, 아내와 옆집 형수, 그리고 사랑채 여자는 힘들이지 않고 쉽게 척척 잘 해 낸다. 도대체 이 여자들은 무얼 먹고 저리 일을 잘 하는 걸까.

지난해에도 그랬다. 밭고랑에 잡초가 만발해, 적어도 하루쯤 날 받아 힘들여 뽑으리라 작정하는데 옆집 여자 쓱싹 한두 번에 몽땅 뽑아 버리는 것이었다.

당초 약속이 있었다. 고추를 심고 따다 말려 내다 팔아 버는 돈까지 아내가 맡아라. 나는 농약만 맡겠다. 그렇게 했다. 그렇게 몇 년 족히 흘렀다. 그런데 올해는 아니다. 부동산을 파업하고 나니 출근할 곳도 없어 사시장철 아내 곁을 맴돌게 돼 꼼짝없이 아내 일을 도와야 한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꼼짝 못하고 고추밭 두둑을 만드는 중인데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일은 확실히 제때에 해야만 한다. 이따가, 다음에, 쉬었다가 했다가는 일을 그르치는 게 다반사다. 언제나 그랬다. 힘이 들면 다음에, 쉬었다가, 좀 있다가. 종당에 모두 아내 차지다. 하던 일을 끝내지 못한 게 생각나 한

참 후 아내에게 물으면 그 일이 여태 있어요. 내가 다 끝냈어요했다.

미안한 줄도 몰랐다. 다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때 늦게 어머니에게 하던 말이 아내에게도 적용된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것처럼 아내도 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아마 아내와 헤어지고 나면 틀림없이 그 제목으로 글을 쓰고 말지. 내가 저승에서 이승의 아내를 내려다보며 쓰던가, 이승에서 저승을 올려다보며 쓰던가.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막내아들이 그렇다. 항상 일을 하다가, 하기 전, 언제나 하는 말.

다음에요.”

쉬었다가요.”

이따가요.”

그러다 시기를 놓치면 언제나 아내 차지다. 그래서 막내아들 일 시켜먹기 힘들다는 게 노래다.

저놈이 지 애비 닮아서 저렇지라는 말이 안 나와 퍽 다행한 일이다.

하다가 중지 곧 아니 한 일이 하나 둘이랴. 러닝머신을 사다 놓고 몇 달만에 중단한 일, 자코메티를 감상하고 나오면서 열심히 쓰고, 또 쓰리라하고 다짐하며 사온 연필, 틀림없이 독파할 것이라 장담하고 사들인 파스칼, 위스망스, 하이데거, 양자역학, 미메스, 그렇게 낭비한 돈, 읽다가 읽다가 지쳐 나자빠진 염력, 기어이 제풀에 떨어져 구겨진 자존심. 조선시대 10만 양병설도, 편안과 안일을 일삼던 실세, 조정 문신들이 언젠가 크게 다칠 것은 빤히 알면서도 당장 편하고 달착지근한 안일을 위하여 이따가, 쉬었다가, 다음에하다가 당하고 말았다.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에 전쟁 준비하기 싫은 안일이 황윤길의 보고가 듣기 싫었고 김성일의 보고가 썩 마음에 들어 채택했을 뿐아니라 지금 당장 말고, 다음에, 이따가, 기어이 두 해도 못 넘기고 왜란을 맞아 작살나지 않았던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이따가, 다음에, 쉬었다가는 당신을 망하게 하는 첨단 언어.

능히 금지어禁止語로서 걸어놓아야 마땅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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