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벌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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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벌 신세
  • 유지순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3.1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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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수필가·칼럼위원)
유지순(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유지순 | 양봉 벌 중에 제일 불쌍한 신세가 수벌이다.

여왕벌이 교미할 때 꼭 필요한 수벌은 한 통에 30마리 정도만 있으면 되지만, 여왕벌은 종족 번식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소비(벌집)의 가운데에는 일벌을 낳고 가장자리 쪽으로 많은 수벌을 낳는다. 수벌은 교미 시기가 끝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꿀만 먹어 치우니 양봉농가에서만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벌 사회 안에서도 필요 없는 존재로 수난을 당한다.

수벌은 알에서부터 24일 만에 깨어나는데, 번데기로 있을 때부터 일벌보다 두드러지게 크다. 일벌과 구별이 잘 되어 잘 드는 칼로 수벌이 든 번데기 덮개를 잘라내어 성충이 되기 전에 죽는다. 수벌 유충이 몸에 좋다 하여 찾는 사람이 있어 양봉농가의 수입에 보탬이 된다고는 하지만 측은하기 짝이 없다. 용케 번데기에서 나와 성충이 되어도 일벌보다 색깔도 진하고 덩치도 커서 눈에 잘 띄어 보는 대로 잡아 없앤다.

봄에 꽃이 많이 피어 일벌들이 꿀을 한창 날라다 새끼 키우고 저장을 하려면 일벌의 수가 많이 필요하다. 이때 여왕벌은 많은 알을 낳아 일벌의 수를 최대한으로 늘린다. 상대적으로 수벌의 수도 일벌과 마찬가지로 늘어난다. 한창 꿀을 모아 봄철에 채밀하려고 벌통을 열면 수벌은 벌통의 맨 가에 있는 소비에 몰려 있다. 내역봉(집안에서 청소하고 새끼 키우고 하는 벌)들이 수벌을 귀찮은 존재로 간주하여 벌통의 한 쪽으로 몰아 놓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아무리 벌의 숫자가 많아도 수벌의 교미 상대가 되는 것은 여왕벌 한 마리뿐이니 대다수의 수벌은 이 세상에 태어나도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생존하다 사라진다.

동물이나 곤충, 식물 중에서 암수가 뚜렷한 것은 암컷이 새끼를 낳기 때문인지 수컷보다 더 크고 우위에 있는 것이 많다. 사자나 코끼리 같이 암컷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무리를 이끄는 역할을 하는 동물도 많다.

곤충은 교미가 끝나면 수컷은 암컷에게 잡혀 먹히기도 하니 곤충 세계에서는 수놈은 수벌 같은 신세가 한두 종류가 아니다. 인간도 남자가 대우를 받고 사는 지역도 있지만 모계사회에서는 여자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초기 배불정책 이후에 유교사상의 튼튼한 자리매김으로 남성 우위의 사회가 형성되어 내려왔다. 최근까지 거의 여자는 인격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근대로 오면서 남자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게 되어 혼자 힘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일을 하는 여성이 많아져 사회적으로도 입지가 튼튼해지고 있다. 때문에 육아와 가사문제로 친정 쪽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 자연히 현재는 차츰 모계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추세다. IMF 이후에 많아진 노숙자 중에 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여자는 대개 친정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힘이 세게 생긴 수벌은 먹고 놀기만 하는 데 몸집이 작은 암벌은 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 여왕벌과 새끼 벌 키우기, 집안 청소, 꿀 가져오기, 경비까지 모두 맡아 하니 이런 철저한 모계사회가 또 있을까.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한 부족은 아예 아버지라는 개념이 없다고 한다.

남자가 필요하면 여자가 불러서 하룻밤씩 자고 가고, 아이도 아버지가 누구인 줄 모르며 남자는 철저하게 모계에 붙어서 산다. 꼭 수벌 같은 존재다. 다만 수벌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이 다르다. 남자가 뚜렷하게 책임질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산다는 것은 바로 죽음과 같지 않을까.

벌통을 점검하며 수벌을 제거할 때마다 수벌 같은 신세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치 않다. 우리 사람 사회에서도 수벌 같이 사는 사람이 많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며 사회의 든든한 일원이 되어야 수벌 같은 신세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벌을 볼 때마다 수벌의 삶을 생각하고, 늘 긴장을 늦추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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