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지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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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지 않는 것들
  • 중앙신문
  • 승인 2020.03.0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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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한때 민음사에 미친 적이 있다. 처음엔 책 사이즈가 보편적인 사이즈가 아니라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무슨 책이 이래. 세로 길이는 같은데 가로 길이가 형편없이 줄었다. .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연히 민음사 직원을 만났는데 책 사이즈 때문에 항의 전화가 많이 온다고 했다. 왜 책 사이즈를 너희들 마음대로 바꿨냐. 무슨 책이 이러냐. 별 희한한 책을 만들어 놨구나. 그 전화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던 게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어느 틈에 그 책형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책을 살 양이면 민음사 것을 찾았다. 민음사 세계 문학전집을 구해 서가에 꽂다 보니 횡렬로 한 줄을 거의 차지하게 되었다. 완전히 꽉 채운다. 겨우 7, 8권만 채워 넣으면 된다. 그런데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번번이 책을 구하다 보면 민음사 것이 아니고 엉뚱한 열화당, 열린책들, 문학사상사, 문학동네, 다른, 여초, 한강민음사 책으로 채우기가 의외로 어려워서 2년이 넘도록 채우지 못했다.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이것뿐이랴.

초등학교 때, 넓이뛰기가 신나 보이고 자신 있게 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운동장 한쪽 구석 모래밭에 줄자를 늘어놓고 한 사람, 한 사람 뛰게 했다. 모두들 십여 미터를 달려 껑충 뛰었다. 껑충, 껑충, 껑충, 그리고 나도 뛰었다. 달릴 때 스치는 바람이 좋았고 껑충 허공에 뜬 무중력이 좋았고 떨어져 안착하는 기분이 좋았다.

자꾸 하고 싶었다. 남들 뛰는 중에 슬며시 또 뛰어 보았고 남들 다 뛴 마지막 판, 스타트 라인에 다시 섰다. 선생님이 승낙의 표시로 손을 번쩍 들어 주셨다. 귀 바람이 들리도록 맹렬히 달렸고 태산이 높으면 얼마나 높으랴. 힘껏 뛰어올랐고 내리꽂았다. 세 번이나 달려 뛰었지만 성적은 별로. 그날 몸치란 걸 알았다. 모든 운동은 금물. 축구, 배구, 농구, 수영, 내가 못하는 것들이다. 음악 또한 그랬다.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녹음기를 가동하고 노래를 냅다 불렀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니올시다. 얼른 집어삼켰다. 저건 신 포도야.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내 그릇 중 하나다.

게으름은 인생 전반에서 나를 울린 치욕의 악습이다. 언젠가 목사님이 밭을 가꿔 즉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잡초가 순식간에 잠식해 버린다는 설교를 했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조금 있다 해도 되겠지 차일피일 미루다 완전 쑥대밭이 되고 난 뒤엔 도저히 어쩔 수 없어 농사를 폐농으로 끝내 버린 게 한두 해가 아니다. 내년엔 잘 지어야지. 그런데 때가 되면 게으른 근성이 되살아나 폐농에 이르게 된다. 내버리지 못한 악습 1. 언제 내 부지런의 그릇은 채워질까.

글쓰기는 왜 이리 지지부진한 건지. 진일보하는 날은 영영 찾아오지 않는 건지. 남들은 잘도 일취월장하거늘 나는 왜 이리 지리멸렬한 것인지.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시원한 글, 짠하는 신통력을 발휘해 깜빡 죽어 넘어갈 글은 언제. 답답하기만 한 수필 그릇은 텅텅 비워진 채 멈출 것인지.

내 지적 능력의 확장은 성장을 멈추었는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서 멈춘 철학, 완결판의 문턱은 넘지 못하고 만 미학, 엉뚱한 시학에서 과락을 했던 시험, 대들지도 못한 푸코와 사르트르, 끝장을 보지 못한 내 지적 능력은 왜 이리 누추하기만 한지. 채워지지 않는 불만의 지식 그릇.

복권이란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수필 공부를 같이 하던 심 선생이 즉각 반응을 보내왔다. 왜 부정적 기능만을 논하는가. 왜 긍정적 기능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가. 그런데 다시 읽어도 긍정적 기능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이며 긍정적 기능을 써야 되겠다는 절박이 심금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 왜 긍정할 줄 모르는가.

왜 써지지 않는 건가. 내 복권에 대한 인식의 그릇은 아직도 빈털터리.

내가 그토록 신봉해 마지않던 환상문학의 실천과 꽃은 언제. 날마다 읽으며 갈고닦던 감성의 그릇은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언제, 언제, 어느 세월에, 어떻게 환상 수필을 쓸 수 있을까. 내 채워지지 않는 또 다른 수필의 그릇.

더욱 심각하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 고프기만 한 것은 끝 간 데 없는 욕심.

누군가 채워지고 나면 잃을 날만 있을 것인데하지만 내겐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그릇들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날마다 채워 넣기에 급급하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빈곤의 그릇들이 오늘도 애를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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