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한 부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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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한 부조금
  • 중앙신문
  • 승인 2020.02.2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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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부음을 받았다.

가셨구나. 도움받았던 일들이 떠오른다.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분은 내게 특별하다. 가끔 만났어도, 내 사무실에 들르셨어도 제대로 모시지도 못했다. 모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워낙 조용하시고 내색하지 않으시는 분이니 더욱 죄스럽다.

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심하신 흔적을 알면서도 헌신짝처럼 저버린 나는 한참 나쁜 놈이다.

워낙 경조사에 잘 빠지는 나라서 이번엔 꼭 가야지 하면서도 기어코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경조사처럼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요즘 한창 농번기라 집에 누군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또 찾아간들 아는 사람도 없다. 거기다 나도 바쁘다. 며칠 후 비가 온다니 비 오는 날 찾아야겠다.

그날이 왔고 비가 왔다. 찾아간들 누군가 아는 사람도 없으니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어찌 견디랴. 아무래도 안되겠어. 비 오는 날 상주 가족 귀찮게 하는 일도 불미스러운 일이야 하며 핑계를 만든다.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급기야 망자의 스마트폰에 걸었다. 그 번호로 걸어도 될까. 돌아가신 숙부님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와, 돌아가신 분이 전화를 하시다니 섬뜩해 하며 전화를 받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 누군가 받겠지 하며 기다린다. 불안한 신호음이 울린다. 하나, , . 받는다. 여자의 목소리다.

옛날 선생님의 덕을 받은 사람이다. 엊그제 장례에 참석 못 해 큰 죄를 졌다. 늦었지만 부조는 해야겠으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 괜찮다. 알려 달라. 안 해도 된다.

승강이하다 어머니 들어오면 문자로 넣어주기로 하고 끊었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건지. 또 다른 결례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부조금이란 것이 그렇다. 상부상조라고 없는 살림에 큰돈 드는 일 생기면 서로 보태 무거운 짐 가볍게 하여 힘든 인생 고개 쉽게 넘어보자는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이다.

꽤 오래된 이야기다. 가난한 집으로 시집 간 여자가 있었다. 남편이 남의 길흉사에 술이나 얻어먹고 다니니 누구 하나 사람 대접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보다 못한 아내는 독한 맘먹고 없는 돈 모아 다른 일 다 때려치우고 경조사에 부조금은 꼭 내게 했다. 그 후 부락민들이 남편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사람 대접을 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고귀한 부조가 타락했다. 나의 아들들 늦장가를 드는 바람에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장가를 들였다. 그런데 꼭 참석해야 할 하객들이 보이지 않는다. 왜 안 왔을까.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 섭섭하게 한 일이 있나. 며칠 연구를 거듭한 결과 답에 근접한 의견이 나왔다.

나이를 먹다 보니 매사에 힘이 부친다. 특히 돈에 관한 한. 앞으로 내가 부조 받아야 할 일이 있을까. 요리 재고 조리 재고 주판알을 튕긴다. 없다. 내가 죽는 경우를 빼곤 없다.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셨고, 아들 딸 시집 장가 다 보냈으며 환갑 진갑 다 지났다. 오늘로 부조금 끝. 그러다 보니 아들, 딸 늦게 혼인 시킨 나 같은 인생 완전 헛 장사다.

이런 경우가 있다. 공직에 있을 때, 그의 음덕으로 매일 저녁 얻어먹은 술이 작은 내를 이룰 만도 한데 그가 죽었으니 만사 제치고 누구보다 먼저 상청에 나가 통곡해도 시원찮으련만 동네 친구들과 미꾸라지 잡으러 냇가로 나가는 놈.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다가 자기 집 경조사엔 여지없이 청첩장 보내와 괘씸한 생각이 들어도 인연이 밟혀 다시 찾곤 했는데 내 집 경사에 청첩장 보내려 해도 어디 숨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배시시 웃으며 나타나 자기 집 청첩장 내미는 손. 쌍팔년도 삼만 원 부조금 받았다고 오만 원이 통상인 지금 삼만 원 달랑 들고 나타나는 얼굴. 크고 작은 부조 다 받아먹고 주소지를 알리지도 않고 이사 간 사람.

내 인생 되짚어 본다. 부조 받고 못한 게 한두 건이 아니고, 대신 부조금 내게 하고 갚지 않은 것도 꽤 많아 한꺼번에 정리한 적도 있으며 부조 안 해 술주정 받은 일도 있고 인편에 보낸 부조금이 당사자에겐 전달되지 못하고 중간에 뜯긴 일도 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갚지 못한 부조금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이제 그만 접자.

그런데 보내준다고 한 계좌번호는 감감무소식이다.

안 되겠어. 직접 찾아가야지. 찾아간다고 도리를 다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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