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허수아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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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허수아비의 꿈
  • 중앙신문
  • 승인 2020.02.0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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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칼럼위원)
김영택(칼럼위원)

양평을 다시 찾아간 날은 계절의 순환으로 인해 빨갛게 농익어가던 고추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밭에 버려진 고춧대들이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과 함께 벼를 탈곡한 후 논바닥에 쌓아둔 볏짚마져 가축사료 용도로 대부분 끄들여져서 그야말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12월의 하순이었다.

모처럼 찾아온 한가한 주말을 청량제처럼 시원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시간만 나면 즐겨 찾았던 양평군 개군면 신내로 승용차를 몰았다. 운전을 하며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은 콘도에 들러 사우나나 하고 시간이 남으면 산 좋고 물 맑은 양평의 아름다운 전원을 드라이브를 통해 즐겨볼 심산이었다.

42번 국도상에 위치한 개군면 신내는 산수경관이 뛰어나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콘도와 음식점 같은 위락시설이 일찍이 조성되어 사시사철 사람을 반긴다.

청운면 도원리 상류에서 발원되어 단월과 곡수를 거쳐 신내에 이르러 인근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흑천은 행락객과 철새들의 여독을 훌훌 털어주고 힘을 북돋아주는 생활의 쉼터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심신이 피곤하거나 겨울의 강추위로 인해 피로가 누적될 때 온천처럼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콘도로 달려가 빙하처럼 얼어붙은 것만 같은 나신을 김이 모락모락 서린 욕조에 푹 담그고 묵은지처럼 축 쳐져 버린 신체의 피로를 풀어버리면 몸속의 노폐물이 시원스레 씻겨져 나가고 활력소가 산뜻하게 재충전되어서 피부로 느껴지는 쾌감은 언제나 최상이었다.

여주의 시골집과 지척간인 양평에 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양평이 알게 모르게 볼거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용문산과 강폭이 넓고 안개강처럼 비치는 두물머리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어 바다처럼 보이는 양수리만 생각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양평군은 낙후된 지역으로 알려졌지만 개발의 순풍을 타고 온갖 유흥시설이 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어서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은 화려함의 착각에 빠져든다.

운전대를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대명콘도에 도착했다 목욕탕 안으로 들어서자 열에 덥혀진 후끈한 수증기가 거친 피부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휘감겨왔다.

온탕과 냉탕을 기분 좋게 오가며 목욕을 하길 두어 시간 날아갈 것 같은 가뿐한 몸상태로 밖으로 나서자 해는 아직도 한낮을 가리킨다. 시계를 보니 몇 시간의 여유는 충분하다 생각난 김에 미리 맘먹어 두었던 용문산 국민관광지 근교까지 달려가 보기로 했다. 신내를 떠나 양평시내로 진입한 차는 곧바로 우회하여 고속도로처럼 변신한 44번 국도에 들어섰다. 이어 강원도를 향해 개미 군단처럼 꼬리를 문 차들의 행열에 슬며시 끼어들어 속력을 높여나가자 차창밖으로 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정리된 것처럼 깨끗하고 단정한 논과 밭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나 봄부터 가을까지 사람들의 눈길을 즐겁게 해 주고 풍성했던 들녘은 이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삭막하고 쓸쓸해 보였다 갑자기 맥이 풀리고 고요한 적막함이 몰려왔다. 목적지를 향해 계속 달려 나가던 차는 주인의 쓸쓸한 마음은 아랑곳없이 둔탁한 엔진 소음을 내며 쉬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간다.

한참을 달려 나가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에 남루한 옷차림의 허수아비들이 온몸을 덜덜 떨면서 하나둘씩 나타났다 전국적인 현상으로 지방 자치단체마다 경쟁적으로 벌리는 지역 축제행사는 이곳 양평에서도 매년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봄에는 산수유축제와 산나물 축제가 있고 가을에는 한우와 허수아비 축제가 있다.

가을의 대표적인 축제행사로 개최하는 허수아비 축제는 참가자들이 저마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우고 논에서 메뚜기를 잡으며 숲에서 알밤을 줍는 등 알찬 행사의 묘미를 즐긴다. 요란스러운 행사가 끝나고 축제 행사의 부산물로 버려져 땅 주인 없이 들판의 지킴이로 홀로 나선 허수아비를 보자 사뭇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누런 곡식 때문에 참새떼를 쫓아야 할 가을철도 아니고 모두가 떠나버린 겨울 벌판에서 허수아비들은 강 추위에도 불구하고 부처의 가르침에 집중한 수도승처럼 긴 고행을 하고 있었다. 두툼한 겨울옷도 아니고 얇은 천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무아 독경에 빠진 모습은 그야말로 육탈과 윤회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였다.

탁발을 하며 시주를 구할양 외롭게 서있는 허수아비의 무언의 호소에 감동이 되었는지 일단의 사람들이 동정을 표시할 양 갈길을 멈추고 갓길에 차를 세운다.

그들의 행동에 자석처럼 이끌려 저 차를 세우고 허수아비들을 바라다보니 하늘을 보며 두 팔을 벌린 허수아비의 모습에서는 세상을 원망 하기보다는 세속의 무상과 허망을 모두 떠나보낸 자비와 평온함이 그대로 이어진다.

겨울바람은 득도에 몰입한 허수아비의 인내를 시험하기라도 하듯이 잉잉 소리를 내며 찬바람을 일으키고 옷을 들추는 심술을 부리면서 추위의 강도를 높여나가지만 허수아비는 구도의 경지에 도달해서인지 아무런 미동도 없다. 아무도 오가지 않고 반기지 않는 겨울 벌판에서 홀로 깨달음을 통해 해탈한 허수아비의 꿈은 오로지 봄이 빨리 돌아와 들판에 푸른 곡식이 쑥쑥 자라나서 떠나버린 새떼와 사람들과의 재회의 만남을 조속히 갖는 것이 바람이고 꿈인 것 같았다.

그런 허수아비의 꿈을 깨우지 않기 위해 도망치듯 조심스럽게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이정표가 가리킨 방향으로 길을 떠났다 차가 떠나자마자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리가 날아와 허수아비의 머리 위에 앉더니 잠시 동안이었지만 인간과 허수아비의 어색한 만남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냉소의 웃음만 깔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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