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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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신문
  • 승인 2020.01.3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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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힘이 든다. 벼 이삭거름 주기가.

남들은 다 기계로 한꺼번에 뿌렸으니 나도 그리했으면 좋으련만 기계 무게 20kg, 비료 무게 20kg, 도합 40kg을 등에 지고 좁디좁은 논두렁에 서서 뿌려야 한다. 그거 나는 못해. 무슨 재주로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논두렁에 선단 말이냐. 지난해 논에 들어가 비료를 뿌리다 두 번이나 나가자빠진 경험이 있는 나다. 가벼운 기계 없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도 시원한 답이 없다. 인터넷에서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게 없다. 그럴 땐 부모님 원망이 절로 나온다. 왜 나를 이리 약골로 만들어 놓으셨는지. 남들처럼 기골이 장대한 항우장사를 만들어 놓으시던지, 아니면 영리한 조조 뺨칠만 한 농사꾼을 만들어 놓으시던지. 이도 저도 아닌 약할 대로 약해 빠진, 둔하디 둔한 멍청이를 왜 만들어 놓으셨는지.

아이고 나는 힘도 없이 꾀도 없이 논바닥에 들어가 얼마나 빠질까측정을 한다. 아니나 다르랴. 올핸 중간낙수 때 비가 자주 와서 논바닥이 마르지를 않아 더욱 깊이 빠진다.

도리 없다. 뿌리자, 그렇게 나는 이삭거름을 뿌린다.

논 한 다랑이를 뿌렸다. 헥 헥 헥 다 뿌렸다. 그런데 다음 논으로 가야 하는데 갈 힘이 없다.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 다시 뿌린다.

ATP(아데노신 3인산)가 비료를 뿌리는 사이 ADP(아데노신 2인산)로 변하면서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방출되는 에너지로 나는 비료를 뿌린다. 그리고 ADP들은 밤사이 ATP로 변해 거뜬히 일어난 것이고 그 ATPADP로 변하면서 또 다시 에너지를 방출할 것이며 그 에너지로 비료를 뿌린다.

참 아는 것도 많다. 그런데 농사에 하나 써먹지도 못하는 멍텅구리 앎일세. 하여튼 그렇게 두 번째 논도 뿌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는데 그 날은 안 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하루 더 쉬자. 이렇게 힘이 든다.

아직도 두 다랑이 논이 남아 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죽기 살기로 논에 들어가 비료를 줄 것이다. 이게 내 생의 마지막이려니 하면서. 하긴 평생 운동도 안 하는 몸이라 일 년에 한두 번 혹사도 시키고 운동 삼아 농사짓기로 하고 시작한 건데 웬 말이 많으냐.

이게 노동이다. 노동은 조상님들의 일생. 조상님들은 노동으로 하루를 시작해 노동으로 하루를 끝마친 분들이다. 삶 자체가 노동이었다. 레크리에이션. 그것은 겨우 19세기에 나온 말이고 산물이다.

내 고등학교 시절인가. 그때 갑자기 생겨난 말이라 어리둥절한 적이 있었고 그 말이 시작되자 이 놈, 저 놈, 운동장에서 운동을 합네, 레크리에이션을 합네 하고 뛰어 다닌 것 같다. 레크리에이션이라니. 레크리에이션 좋아하네. 서울 올림픽 때, 외국인들이 올림픽 구경 와서 올림픽 구경은 안 하고 이 산 저 산 가을 볕을 맞으며 등산하는 걸 보고, 비싼 돈 들여 비행기 타고 와 올림픽 구경은 안 하고 산엔 왜 올라가. 거기서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했다.

요즘처럼 서비스 업종이란 건 구경조차 한 적이 없고 서비스란 말조차 생경하기만 했다.

서양에서 모네가 아르장퇴유의 철교를 달리는 기차를 그릴 때, 그 철교 인근 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는데 그것이 여가선용인지, 레크리에이션의 시작이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리고 이건 순 나의 추측인데 조르즈 쉐라의 그랑자드섬의 일요일 오후는 신사, 유한마담들의 놀이 그림이고, 이 그림의 대척점에 비유되는 게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가 노동자들의 물놀이니 그게 레크리에이션의 시작이며 진수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의 레크리에이션. 아마 자가용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토요일 휴무제가 시작되면서 제대로 된 레크리에이션이 대중화되었을 것이다. 등산 인구가 늘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일단 돈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골프까지 넘보기 시작하면서 노동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논농사만 힘든 게 아니다. 밭농사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고추 700포기를 심는데 트랙터를 빌려 고구마 두럭으로 만들어 두 개의 두럭을 한 개로 합쳐 고추 두럭을 만들자니 딴 힘이 든다. 아내의 주장이 세어지다 보니나는 밀리고 아내의 뜻대로 해야 한다. 줄을 늘이고 한개의 줄을 파 이리 넘기고 저리 넘겨 개마고원만 한 고추 두둑을 만들어 검정 비닐을 덮고 바람 안 들어가게 눌러 끝단을 흙으로 덮는다. 고추 심고, 말뚝을 박아 줄을 늘여 고정시킨다.

그런데 하룻저녁 고라니가 내려와 허리를 딱 잘라 먹었다. 아뿔싸, 저걸 우짜. 농약 방에 물어보고, 지도소에 알아보고. 신기한 약은 없다. 궁여지책으로 정강이 높이로 줄을 늘여 주는 것. 독한 농약을 주변에 뿌려주는 것. 그 정도다. 그것도 미지수란다. 할 수 없지.

궁여지책으로 독하디 독한, 똥을 싸게 비싼 토양 살충제를 사다 밭 가장자리, 고추밭 가장자리, 그리고 고추밭 여기저기에 뿌렸다. 아내는 정강이 높이만큼 비닐 끈으로 고추밭 주위를 팽팽히 늘여 놓았다. 날이 기울었다. 잠자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올라가니 고라니는 오지 않았다. 비닐 끈 덕인지, 약 냄새 때문인지. 오지 않았으니 천만 다행이다. 그 놈도 습관성이 있어 가는 곳만 가는 법이다. 그 습성을 단칼에 잘라 버렸으니 당분간 안심해도 되겠다.

그렇게 농사지어 내 식구만 먹어도 이리 힘이 드는데, 옛사람들은 내 땅이 어디 있었나. 양반의 땅을 임대 내어 죽어라 농사지어 양반에게 임대료 내고 세금 내고 탐관오리 달라는 대로 주고 나면 남는 건 별로. 그 정도면 농사도 아니요, 노동도 아니다. 농노, 허울 좋은 사농공상, 농자천하지대본. 비천한 종에 버금가는 헐벗은 인종으로서의 농사꾼의 삶이 어떠했을까.

솔제니친의 장작 패기, 이승만 대통령의 장작 패기는 화려한 신선놀음이지 노동이라고. 돈벌이를 위해 하루종일 부잣집 장작 패주고 돈 몇 푼 들고 나오던 장작 패기가 진짜 노동이다.

주경야독이란 말이 있다. 나도 농사꾼이 처음되고 주경야독하려 했더니 천만의 말씀. 팔다리, , 옆구리, , 안 아픈 곳이 없는데, 무슨 놈의 야독. 누웠다 하면 코 드르렁, 냅다 잠자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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