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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1.2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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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일흔이 넘어 건강검진을 받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특히 대장내시경은 대장을 말끔히 비워내야 하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다. 전처리제를 저녁 일곱 시부터 서너 시간 내에 모두 마시고 쉴 새 없이 설사를 해 가며 대장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3시부터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에너지가 몽땅 소진되고 만다.

그래도 전처리제가 예전에 비해 좋아졌다.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사라졌고 비타민C가 함유되어 맛과 향이 좋아 마시기 쉬웠다. 마시자마자 화장실에 드나들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설사도 끝. 그 아우성을 치며 쏟아지던 설사가 감쪽같이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3시부터 전처리제를 마셔 설사로 화장실 왕복 출입이다. , 어쩌지. 이 설사로 한 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야 하다니. 그런데 아니다. 나올 설사도 없어 끝이 났는가. 감쪽같이 설사가 멎었다.

거기까지는 걱정과 근심으로 점철된 생각의 고통이라 치고, 위내시경은 목에서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 삽입할 때와 뺄 때 심한 구역질로 역겨웠다. 대장내시경은 더욱 힘들었다. 삽입과 검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왜 그리 힘드는지. 대장에 괄약근이란 불수의근이 있었던가. 내시경이 대장을 틈입하고 빠져나오는 동안 가끔 불가능한 구역을 통과하는 것만큼 심한 고통이 따르고 주체를 몸서리치게 한다. 확실히 이건 위내시경 검사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그렇게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생각하니 기억 속에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내가 일제 강점기 모르모트 실험용 신체 토막은 아닌지.

삼사십 년 전 태평양전쟁을 읽은 적이 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혈안이 된 일본 군부는 생물학전을 치르기 위해 수감 중인 죄수들에게 생체 실험을 한다. 실험 대상 인간은 한 마리 모르모트.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아야 하며 약물로 인한 신체의 변화 과정을 일일이 관찰 당한다. 주사를 맞고 관찰 대상이 되는 수감자는 조선 청년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윤동주 시인도 그들 중의 한 명이다. 일본 의사들은 그들을 토막이라고 불렀다.

전승을 위하여 인간 육체의 외부와 내부를 완전무결하게 탐구하는 하나의 실험물. 주사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면밀히 관찰한다. 이게 죽은 거야. 병든 거야. 죽었으면 몇 시간 만에 죽었고, 병이 들었다면 무슨 병. 주사 후 몇 시간 만에 발현되는가. 그들에게 공포로 떨고 있는 모르모트로서의 죄인들이 어찌 인간으로 보일까. 그래서 그들은 죽어가는 피 관찰자들을 토막이라 불렀다. 윤동주의 시 같은 건 눈에 보이지도 않았으리라. 그의 시에서 우주를 포괄하는 인간의 최첨단에 서서 부르던 순수를 읽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그의 신체, 토막만이 보였을 것이다.

하나로 된 것을 몇 개의 부분으로 자르거나 갈랐을 때, 그 하나하나의 부분. 수 관형사 뒤에서 의존적 용법으로 쓰여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 명사지만 독립된 언어가 아닌 의존명사. 잘게 잘리거나 부러진 나무토막이나 쇠토막. 아무짝에 쓸모도 없는 쓰레기의 일종,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사라져도 아쉬울 게 없는 모종의 소모품.

이 년 전 보건소에 근무하던 전문의의 의사 수업 과정에서 할당된 실험용 시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모르모트로서의 시체에 관한 생각. 냄새도 색깔도 없고 의미도 특징도 없는 실험용 시체. 그냥 실험용으로서의 시체.

그런데 내 입장이라면 한 인간의 인격과 생각과 감각과 추억과 희망이런 모든 것들이 생각과 생각이 첩첩이 쌓여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볼 것이라는 생각들로 밤잠을 설치며 아무 일도 못할 것만 같은데, 아니란다. 그냥 공부를 위한 도구, 일반적인 실험 실습용 도구로 보일 뿐이란다. 이 사람 감각이 둔한 거 아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예민했고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오감의 적극적 반응이나 정신적 예지 또한 날카로웠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내 생각과 같이 실험용 시체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다면 어느 누가 의학을 공부하고 의과 대학생이 되겠는가. 시체 한 번 보고 호들갑을 떨던가, 무서워 뛰쳐나간다면 어찌 의사가 될 것이며, 세상에 많은 의사들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의사 수업 과정에서도 그러한데 전쟁에 광분하던 일본 의사들이야 당연히 그리고 모르모트의 존재보다도 더 못한 조센징이라고 굳게 의심치 않았으니 토막만으로도 꽤 괜찮은 대우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는데 그 당시에는 오죽했으랴.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일본인들이 토막으로 사용한 조선 청년의 신체를 안팎으로 깨끗이 씻어 냈으리라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안팎으로 완전히 청소를 하고 나니 토막이 된 기분이다. 전시된 토막이나 누군가에게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토막.

며칠 전 자코메티 전을 관람했다. 인간 육체의 근육과 단백질로서의 살을 쏙 뺀 뼈만 남은 골절로서 걸어가는 사람.’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그에게 가장 생소했던 조각으로 승부를 걸었던 화가. 세계대전에서 무수히 죽어간 인간들, 속절없이 죽어가는 인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머릿속에 생각하는 기억들, 모든 사유들, 그것들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몸뚱이의 가벼움을 생각해 뼈만 남은 신체를 만들었을 것이라 읽었다. 가볍게 날아간 머릿속의 모든 것들의 무게, 자코메티에게 그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 무거움에 반해 하염없이 가벼울 수밖에 없는 인체를 이렇게 뼈만 남은 인간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실상 그에게는 토막으로서의 인간인 것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신체, 나의 토막은 너무 살찌고, 비대하고, 무겁고.

이 토막으로서의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도구로 쓰였으며 누구를 위하여 쓰여질까. 어듸다 더듸던 토막인고, 누리라 맞히던 토막인고. 뫼리도 괴리도 없이 맞아서 우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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