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잔액 2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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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잔액 2600원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1.1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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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통장 잔액 2600. 망했다. 부동산 16개월 만에 문을 닫는다.

망할 조짐은 40여 년 전 공인중개사 시험에서 시작된다. 공인중개사 시험 공부는 부동산으로 돈이나 왕창 벌어보자는 욕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냥 공부하는 것이 좋아 기왕에 시작한 공부이니 공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부동산 매매엔 관심이 없고 공부에 미쳐 공부를 위하여 공부에 의하여 공부의 부동산 공법이니 민법총칙이니 건축법이니 세법이니 달달달 외우고 또 외워서 시험에 매진한 것 뿐이다. 그걸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았다. 따라서 통장 잔액 2600원 나는 부동산 정통파가 아니다.

생각 좀 해 보자. 평생 공무원만 해 먹은 내가 무슨 재주로 부동산에 뛰어 들었는가. 수필가가 되는 것도 천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더구나 부동산은 타고난 재능과 전문성이 어우러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부동산 중개인이라면 누가 사무실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어떤 물건이든 꼭 팔아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맹랑한 근성이 있어야 한다. 고객이 손해를 보건 말건 그건 중개인의 소관이 아니다. 일단 팔아먹어야 한다. 팔아먹는 순간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태생적 근성이 있어야 한다. 매매가 성사된 뒤 고객에게 실은 여차여차해서 당신이 게임에서 졌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환불해 주는 부동산 중개인이 된다는 것이내 모토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해보고 싶어도 손님이 들어오기나 해야지.

모든 장사는 자리가 80% 이상 좌지우지한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다니. 뿐만 아니다.

주차장도 없고, 진입로까지 마땅찮은 자리에서, 쯧쯧.”

부동산 도사 몇 분이 찾아와 자리를 잘못 골랐다는 걸 알려 주었건만 엉뚱한 자기 고집만 세우고 대들다가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첫날부터 그랬다. 손님 한 사람 없었다. 있어 봤자 일주일에 하나, , 그것도 손님이 찾는 물건은 없었다. 애당초부터 내 물건은 없었다. 동업자 권 회장의 물건에 의지하고 시작한 것이다. 내겐 물건 가져다 줄 사람도, 친구도, 일가친척도 없었다.

부동산 시작의 원칙-가장 잘 아는 곳에서 시작하라.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은 곳에서 시작하라. 나는 이걸 무시하고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라고 믿는 구석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다. 현대는 온라인이다. 온라인이 아니면 안 된다. 모든 부동산은 인터넷이 시작이고 끝이다. 이게 내

신조였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웹문서 작성법을 독파했다.

네이버 ‘modoo’ CD를 구해 열심히 반복학습을 한다. 무려 3, 4개월. 됐다 싶어 홈페이지를 인터넷에 띄웠다.

그러나 방문자가 없다. 방문자를 찾는 방법을 학습해서 다시 올려 보지만 시원치 않았다. 엉뚱한 파워 블로그를 만들어 준다고 전화는 아우성이었다. 가만있어. 나도 블로그 정도는 만들어. 그리하여 블로그를 만들었다.

daum에도 하나, naver에도 하나. 그런데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CD를 구해 배우고 또 배우고,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왜 이리 오르기는 힘들고 망각의 속도는 빠르냐.

학습 방법도 그렇다. 교재는 없고 오로지 동영상뿐. 교재로 학습하던 세대라 동영상 학습이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노트에 힘껏 기록하지만 어느 틈에 기록하던 걸 잊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기록한 노트마저 던져 버리고 동영상 세상에 빨려 들어가 동영상 광장에서 길을 찾았다. 그런데 갈 길은 멀고 지나온 길은 쉽게 잊고 하염없이 헤맸다. 통달했다 생각했는데 2, 3일 지나면 까맣게 잊고 말았다. 다시 공부, 독서백편의자현, 책상 앞 격문으로 걸어 놓고 기를 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여를 인터넷과 싸워 기어이 돌파했다.

그런데 막상 끝장을 내고 보니 모든 게 보기 싫어졌다. 인터넷이 그렇고 ‘modoo’도 그렇고 블로그.

부동산을 시작하면서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안읽고 안 쓰기로 맹세한 걸 허물고 소설을 읽는다. 수필을 쓴다.

문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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