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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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20.01.09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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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아들이 대학입시를 치르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던 어느 날, 아들에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가 지원한 대학 합격자 발표 날이란다.

나 겁나 못 가 보겠다. 대신 네가 가 봐주면 안 되겠니?”

싫어.”

어쩌면 그렇게 쉽게 거절할 수 있을까. 친구란 녀석이. 내 아들이지만 괘씸했다. 정말 너는 나쁜 놈이다. 그래서 그날부터 아들은 나쁜 놈이 됐다. 아들은 이름 대신 나쁜 놈으로 불려졌다.

나쁜 놈, 밥 먹어라.”

나쁜 놈, 일 좀 하자.”

나쁜 놈, 어디 갔다 왔니.”

나쁜 놈, 시험은 잘 본 거냐.”

그렇게 일 년은 나쁜 놈으로 통용되다가 어느 날 아들을 보고 나쁜 놈이라 전화했던 아들의 친구가 왔다.

아들이 소개했다.

일 년 전에 나보고 나쁜 놈이라고 전화했던 애예요.”

, 그래. 네가 나쁜 놈이로구나.”

아들의 친구는 어리둥절했고 우리는 그를 졸지에 나쁜 놈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말았다. 따라서 아들 = 나쁜 놈발화자 = 나쁜 놈으로 도치되고 말았다.

나쁜 놈, 나쁜 놈, 몇 번 되뇌다보니 뭔가 가슴을 콕콕 찌른다. 이게 뭘까. 곰곰 생각해보고 조용히 나쁜놈, 나쁜 놈뇌어보니 양심이 심장에 못을 박는 중이다.

나쁜 놈은 아들도 아들의 친구도 아니고 나다. 양심이 심장에 대고 나쁜 놈이라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뒤돌아본다. 나의 일상, 행동, 순간순간 마음 씀씀이, 생각의 작은 조각들, 그렇다. 엘리베이터에 급하게 뛰어 오며 같이 가자고 하면 남들은 정지 버튼을 눌러 같이 타고 오르는데 나는 얼른 닫힘 버튼을 누르고 싶은 심정을 애써 누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며, 식당에서 제멋대로 뛰어다니는 녀석을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 뿐 아니라 남들이 잘 참는 걸 보면 은근히 부아가 끓어 도사가 된 그들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기억술 책에서였던가. 기억을 분석해 보면 기쁜 것이 60%, 나쁜 것이 30%, 평범한 것이 10%라고 한 걸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내게 모든 추억을 반추해 보니 기쁜 건 보이지 않고 나쁜 기억들, 잘 못한 일들만 자꾸자꾸 생각난다. 기쁜 게 60이 아니라, 나쁜 기억이 60, 기쁜 것이 30. 아니다. 모든 게 나쁜 기억 뿐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만 자꾸자꾸 생각난다. 모든 게 나쁜 기억 뿐인 내겐 언제나 우울한 추억 뿐.

어머니, 내가 어머니를 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놈이다. 어쩌면 아버님과 어머니의 다툼에서 설사 아버지의 논리가 맞다 해도 왜 어머니의 편이 못 됐는지. 중뿔나게 무슨 이상이니 이론이니 그것이 아버지의 것이 맞는다 해도 어머니의 편이 한 번도 되지 못 했는지. 아들에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그렇다고 아버님께 잘한 것도 없다. 아버지가 구두 한 켤레 그토록 원하시던 걸 매몰차게 거절했던 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럼 그만두지, 하시며 못내 아쉬워하던 그날 저녁이 내겐 모질게 추웠어야 하거늘. 하필 따듯한 하루였으니 참 모진 놈이다. 그러곤 아들이 구두를 사주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떳떳하게 신는 나다. 더럽게 치사한 놈. 나쁜 놈.

할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더욱 고약하다. 할머니의 저지를 따르지 않고 밤새워 할머니의 의사를 거역한 손자 놈이니 참으로 악독한 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숙부님, 고모님, 이모님에 대한 기억 또한 대동소이하다. 숙부님은 돌아가시기 마지막 대면에서도 외면하셨으니 얼마나 숙부님에게 불편한 놈이었을까. 숙모님, 이모님 또한 그러하다. 어려서 그리 살갑게 대해 주시던 그분들이 연로하신 후 만나기 거북한 놈으로 변했으니 얼마나 섭섭하게 해드린 걸까.

조상님들께 효도 한번 해 보지 못한 놈이다. 사후 영혼 존재를 부정하는 나이고 보니, 조상님의 존재는 생각지도 못 하는 나다. 따라서 참으로 나쁜 놈이다. 조상님들의 산소조차 제대로 돌보지 않은 놈. 나쁜 놈.

아들에게조차 그렇다. 어려서부터 기죽여 놓고 키웠으니 얼마나 세상 겁먹고 살아가고 있을까. 거기다 유산으로 남겨놓을 재산마저 제대로 갖추어 놓지 못했으니 참으로 나쁜 놈이다.

= 나쁜 놈 × 나쁜 놈, 따라서 (나쁜 놈)². 반성을 하기에도, 회개를 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아주 나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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