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순 칼럼]비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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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칼럼]비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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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2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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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공허한 손으로 커피를 탄다. 무언가 해야겠는데 딱히 해야 할 ‘무엇’이 잡히질 않고 있다.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일까?

티스푼에 커피 가루를 떠서 컵에 넣고 가득 뜨거운 물을 붓는다. 한 스푼의 커피 가루가 부어지는 물을 모두 커피 빛으로 물들인다. 물은 금세 커피 한 잔이 된다. 따듯한 김이 오르고 향이 내 몸을 감싼다. 마시기도 전에 커피는 나를 사로잡는다. 내 속에서 피어오르던 생각들도 그렇다. 처음엔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나중엔 나를 온통 채우고 만다. 신기하게도 그런 수많은 생각들이 커피에 녹아 사라진다. 지금은 커피 한 잔으로만 편안하고 싶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인스턴트커피 한 잔이 내 텅 빈 손을 잡고 비 내리는 창가로 이끈다. 찬 손끝이 따스해지고 있다. 창밖엔 굵은 비가 느티나무 가지를 흔들며 내린다. 집 앞 개울에도 빗줄기가 수없는 빗금을 긋고 대문 앞 차 길은 또 다른 개울이 된 것처럼 물이 흐른다. 맑던 개울물은 누가 커피 가루라도 뿌린 듯 흙물이 되어 간다. 흙빛이 왠지 커피처럼 보인다. 색이 변해가는 개울물에서도 커피 향이 나는 것 같다. 빗물에 몸을 씻느라 눈을 감은 느티나무가 그 향에 취한 듯 서있다. 물소리와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다 삼켰다.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빗물이 빠른 리듬을 탄다. 빈 것 같던 내 일상이 어느새 비와 커피의 연주로 채워져 간다.

전화 벨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낙숫물 소리처럼 내 마음속에 떨어진다. 오늘따라 친구의 목소리는 그윽하다. 우리 둘 앞엔 이미 커피 잔이 놓이고 그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안부를 묻는다. 개울가의 우리 집이 장대비에 별일 없냐고 시작한 인사는 그저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얘기하며 또 다른 개울물처럼 흘러간다. 둘 사이에 커피와 빗소리가 같이 출렁인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춤추듯 들릴 무렵 처마 밑에 피어있던 백합 꽃잎이 힘없이 떨어져 풀밭에 눕는다. 지는 꽃 위쪽엔 봉오리는 비에 얼굴을 맞으며 흔들거린다. 흔들리면서, 비를 맞으면서 그렇게 힘겹게 봉오리를 열 모양이다. 커피 향에 진한 백합 향이 같이 섞인다.

전화를 끊을 무렵 찻잔은 비어갔다. 그리고 빈 잔 가득 친구의 일상이 또 다른 빛의 커피가 되어 일렁이고 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개울엔 어느새 물가에 난 풀들이 잠길 만큼 물이 불었다. 흙물은 더 진해지고 물살은 더 빨라진다. 내 잔에 가득하던 커피는 사라졌는데 웬일로 흘러가는 물에서는 커피향이 계속 난다. 한바탕 맑은 물에 커피 가루를 뿌려대듯이 휘몰아치던 빗줄기는 잔을 저어 바닥의 가루를 녹이듯 개울물을 자꾸 흔든다. 개울물을 커피 잔 삼아 빗속에서 산자락이 커피를 마신다.

비 오는 날 커피 한 잔이야 혼자면 어떠한가? 더러 마주 앉을 친구가 있어도 좋고 오늘처럼 멀리서 전화하는 친구만으로도 마음이 넘친다. 그냥 커피 한 잔이 그대로 친구가 되는 날이니 말이다. 개울가에 내려온 산자락도 그렇게 내 벗이 되고 지는 꽃잎 한 장도, 피는 봉오리도 모두 빗물에 씻은 맑은 얼굴로 나를 만난다. 빗물이 세상을 씻고 나니 나 또한 마음이 젖어온다. 나도 막 세수한 마음으로 이젠 빈 커피 잔을 들고 산자락과 마주한다. 개울물의 커피향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산이 나를 마주보며 보일 듯 말 듯 웃는다. 커피 한잔 안에서 내가 쉬고 있다. 빗물에 젖어.

내 마음도 빗물에 씻기고 있는 걸까? 무수히 날아다니는 먼지 같은 잡념들을 흐르는 빗물에 흘려버리고 싶다. 한바탕 흙물이 흘러가고 나면 다시 맑게 가라앉아 평온하게 흐르는 개울물처럼 나도 다시 맑고 평온해 지길 기다리게 된다. 비 내리는 오후, 커피 한 잔에 깊게 잠겨 잠시 멈춰서고 싶은 날이다. 비와 커피에 나를 온전히 맡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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